진실로 회심했는가
PART1 당신 회심은 진짜인가?

7 참된 회심은 합당한 열매가 반드시 있다

거듭남의 증거

우리는 죄 사함을 얻기 위해 예수께 나아감으로써 구원을 얻는다. 우리가 이렇게 할 수 있는 것은 하나님의 자비와 은혜 때문이며, 또 성령님이 일하시기 때문이다. 회심한 사람은 선한 일을 행하여야 하는데(엡 2:10), 우리가 선한 일을 행하도록 우리 안에서 역사하시는 분은 성령님이시다.

골로새서 1장 29절에서 알 수 있듯이, 바울이 힘을 다하여 수고했지만 그가 하나님이 원하시는 삶과 사역의 열매를 맺을 수 있었던 것은 그 안에서 하나님이 강력하게 역사하셨기 때문이다. 바울의 말을 들어보라.

나도 내 속에서 능력으로 역사하시는 이의 역사를 따라 힘을 다하여 수고하노라 골 1:29

그리스도인은 믿음으로 시작했다가 행위로 끝나지 않는다. 다시 말해서, 믿음으로 시작한 그리스도인이 하나님께 은혜와 자비를 계속 얻기 위해서 행위에 의지해야 하는 것이 아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인의 선행(善行)은 그가 거듭났다는 증거로 간주되어야 한다.

우리는 이런 선행을 ‘회심한 사람들의 징후’라고 한다. 성경이 회심의 징후들의 완벽한 목록을 일목요연하게 제시해주지 않기 때문에, 또 이런 징후들이 무수히 많기 때문에, 나는 다음에 아주 명백한 것들에 대해서만 언급하겠다.

새로 회심한 사람에게서 이런 징후들이 어떤 일정한 순서에 따라 나타나야 한다는 법칙은 없다. 그리스도인들이 겪는 경험들이란 것이 그렇게 간단한 것이 아니다. 목회를 하는 동안 내가 본 바에 따르면, 그리스도인들의 경험은 매우 다양하다.

어떤 사람들은 회심하자마자 전도에 열정을 보인다. 어떤 사람들은 성경에 미친 듯이 몰두한다. 어떤 사람들은 열심히 주님을 찬양하고 경배한다. 어떤 사람들은 몇 시간씩 기도한다. 또 어떤 사람들은 이런 모든 것들에 열의를 보인다.

참된 회심의 징후들

회심한 사람들의 징후를 묘사하기 위해 내가 사용할 본(本)은 나의 개인적 체험에서 나온 것인데, 이것이 표준적인 것은 아니겠지만 그래도 이해하기는 쉬울 것이다. 이중에서 당신의 삶에서 나타나는 징후가 있는가?

* 마음의 평안 * 세례
* 그리스도와 하나가 됨 * 하나님과의 관계를 발전시킴
* 자기 죄를 하나님 앞에서 깨달음 * 예수님 때문에 배척당함
* 교회의 교제에 참여함 * 복음을 증거함
* 그리스도의 충만함까지 성장함 * 드리는 법을 배움

마음의 평안

예수님을 믿는 사람은 평안을 느낀다. 나는 내가 지옥에 갈 수밖에 없는 존재이며 예수님을 완전히 거부할 수도 있는 위험성에 노출된 존재라는 것을 알았다. 그러나 예수께 나아간 후 나는 죄를 용서받았다고 느꼈다.

이런 얘기가 진부한 얘기로 들릴지도 모르겠지만, 분명히 나는 무거운 짐이 내게서 벗겨졌다고 느꼈다. 당시 나는 내가 느낀 것을 그 누구에게도 말하지 않았다. 그것은 개인적이고 내적인 체험이었다.

내가 느낀 것을 가장 잘 표현할 수 있는 단어를 고르라면 그것은 ‘기쁨’일 것이다. 그전에 나는 하나님께 감사한다는 것에 대해 생각해본 적이 없었지만, 그때에는 예수님께 감사했다.

세례

세례는 그리스도인의 삶에서 표준적이고 지극히 중요한 부분이다. 왜냐하면 그것이 회심 후에 밟아야 할 가장 자연스러운 단계이기 때문이다. 예수께서 사도들에게 새 회심자들에게 세례를 주라고 가르치셨기 때문에, 초대교회의 그리스도인들은 회심 후에 세례를 받았다. 세례를 받는 것은 순종의 행위이다.

그리고 이것은 다른 사람들 앞에서 예수님을 구주로 믿는다고 고백하는 한 방법이다. 여러 해 동안 나는 그리스도를 믿는다고 공언하면서도 세례 받기를 거부하는 사람들을 보면서 그들의 회심 간증에 흠결이 있다고 생각했다.

그리스도와 하나가 됨

예수께서는 그분을 따르는 자들이 그분에 대한 신앙을 고백하고 인정할 것이라고 말씀하셨다. 그리고 “누구든지 사람 앞에서 나를 시인하면 나도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 앞에서 저를 시인할 것이요”(마 10:32)라고 말씀하셨다.

이렇게 말씀하신 다음 바로 다음 절에서 “누구든지 사람 앞에서 나를 부인하면 나도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 앞에서 저를 부인하리라”(마 10:33)라고도 말씀하셨다.

회심자가 주님과 하나가 되는 것은 어렵지 않게 일어난다. 왜냐하면 그가 주님에 대해 새로운 태도를 취하기 때문이다. 회심 전에는 주님을 무시하거나 두려워하거나 자신의 생각 밖으로 몰아내거나 과소평가했지만, 회심 후에는 주님이 그의 마음속에서 전혀 다른 위상을 차지하신다.

회심한 사람의 마음속에서 주님은 이제 그의 사랑하는 구주요, 오직 그를 향한 사랑 때문에 십자가에서 피를 흘리고 죽으신 분이시다. 예수라는 이름만 들어도 왠지 마음이 불편했던 사람이 이제는 주님의 이름에 끌리게 된다.

하나님과의 관계를 발전시킴

그리스도인의 삶의 본질은 하나님과의 관계이다. 의사소통은 인간이 맺는 모든 관계들의 본질적 부분인데, 하나님과의 관계에서도 마찬가지이다. 성령의 감동으로 기록된 하나님의 말씀은 하나님께서 우리와 의사소통하시는 주요 방법이다. 성령님은 성경의 진리를 (대개는 우리가 모르는 방법들을 통해) 신자의 삶에 적용하신다. 그리고 기도는 우리가 하나님께 말씀드리는 주요 방법이다.

회심한 사람과 하나님 사이에는 관계가 시작되어 천천히, 꾸준히, 그러나 쉽지 않게 발전해간다. 이 관계는 평생을 통해 계속 발전한다. 어느 때나 이 관계가 완전할 수는 없으며, 때로는 악화되기도 한다. 하지만 우리의 반역에도 불구하고 완전히 끊어지지는 않는다.

어떤 그리스도인들에게는 성경 읽기가 어렵지 않다. 내 경우를 보아도 나는 회심한 후 얼마 안 되어 하루에 신약과 구약을 각각 한 장씩 읽는 습관을 가졌다. 하지만 기도는 좀 더 어려웠다.

어떤 날들에는 한 번에 오랜 시간 동안 앉아서 기도할 수 있었지만, 또 어떤 날들에는 1분이나 2분도 앉아 있지 못했다. 내 경우, 성경을 읽으면 기도할 마음이 생겨서 기도할 때가 있는데, 이런 경우가 가장 좋은 경우라고 할 수 있다. 성경 읽기든 기도든 아무리 많이 해도 지나치지 않다.

어떤 때에 나는 며칠 또는 몇 주 동안 계속 메마르고 무기력하기도 한다. 하지만 나는 이렇게 메마른 기간에 나 자신을 책망하지도 않고 포기하지도 않는다. 오히려 주님이 새로운 힘을 주실 때까지 주님과의 관계에 더욱 힘을 쏟는다.

자기 죄를 하나님 앞에서 깨달음

하나님과 관계를 맺는다는 것은 정결케 하는 과정을 밟아가는 것이다. 왜냐하면 주님께서는 사랑하시는 자를 징계하시기 때문이다.

주께서 그 사랑하시는 자를 징계하시고 그의 받으시는 아들마다 채찍질하심이니라 히 12:6

무릇 내가 사랑하는 자를 책망하여 징계하노니 그러므로 네가 열심을 내라 회개하라 계 3:19

우리가 우리 삶 속의 죄와 씨름하게 되면 우리와 하나님 사이의 관계가 영향을 받는다. 내가 회심하기 전에는 죄의 행동을 해도 아무렇지 않았지만, 회심 후에는 신경이 쓰였다.

나는 그 이전에 스트레스를 많이 받는 힘든 시간을 견뎌내기 위해 사용했던 반항적인 방법들이 사실 죄라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그러자 놀랐고 혼란스러웠고 굴욕감을 느꼈으며 때로는 화가 났다.

자기 힘으로 죄를 중단하려고 애쓰면 대개는 실패하기 때문에 우리는 그리스도인의 삶을 사는 것이 우리에게 맞지 않는다고 생각할 수도 있다. 그러나 시간이 흐르면서 우리는 그리스도의 완성된 사역과 그분의 의(義)를 의지하는 것만이 죄를 이기는 방법이라는 것을 천천히 배워가게 된다.

회심한 죄인이나 그의 죄의 문제에 대해 논할 때 우리는 큰 역설(逆說)을 발견하게 된다. 나는 이것을 ‘완전한 죄인의 역설’이라고 부른다. 우리는 완전해야 한다. 왜냐하면 예수께서 “그러므로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온전하심(완전하심)과 같이 너희도 온전(완전)하라”(마 5:48)라고 말씀하셨기 때문이다.

완전은 가능한 최고의 기준이다. 그런데 그리스도인이 자기의 노력으로 완전해지는 것은 불가능하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은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완전하게 하셨다. 그러나 그리스도인은 그리스도 안에 있고 하나님 앞에서 완전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죄를 짓는다. 사도 요한은 이렇게 말했다.

만일 우리가 죄 없다 하면 스스로 속이고 또 진리가 우리 속에 있지 아니할 것이요 만일 우리가 우리 죄를 자백하면 저는 미쁘시고 의로우사
우리 죄를 사하시며 모든 불의에서 우리를 깨끗케 하실 것이요 만일 우리가 범죄하지 아니하였다 하면 하나님을 거짓말하는 자로 만드는 것이니
또한 그의 말씀이 우리 속에 있지 아니하니라 요일 1:8-10

완전한 죄인은 그의 죄를 고백하고 죄 사함을 얻는다. 이것이 ‘완전한 죄인의 역설’이다. 요한은 계속 이렇게 말한다.

나의 자녀들아 내가 이것을 너희에게 씀은 너희로 죄를 범치 않게 하려 함이라 만일 누가 죄를 범하면 아버지 앞에서 우리에게 대언자가 있으니 곧 의로우신 예수 그리스도시라 요일 2:1

요한은 그의 기준을 제시하면서도 동시에 그의 자녀들이 죄를 범할 것이라고 인정한다. “만일 누가 죄를 범하면 아버지 앞에서 우리에게 대언자가 있으니”로 번역된 헬라어 구절은 “만일 누가 죄를 범하면, 그런데 사실 그는 죄를 범할 것인데, 아버지 앞에서 우리에게 대언자가 있으니”라고 번역될 수 있다.

요한은 죄의 문제에 대한 해결책으로 더 열심히 노력하거나 더 많은 믿음을 가지거나 더 많이 기도하는 것을 제시하지 않는다. 그는 그의 자녀들을 부끄럽게 만들 수 있는 표현을 사용하지도 않는다.

예를 들면 죄짓는 그리스도인들에게 “너희는 어떻게 된 거냐?”, “너희는 우리 믿음 공동체의 골칫거리다!”, “너희는 쓸모없는 존재다”라고 말하지 않는다. 단지 그는 ‘유일하게 의로우신 분’ 예수 그리스도를 제시할 뿐이다.

예수님 때문에 배척당함

예수님은 “나를 인하여 너희를 욕하고 핍박하고 거짓으로 너희를 거슬러 모든 악한 말을 할 때에는 너희에게 복이 있나니”(마 5:11)라고 말씀하셨다. 주님은 자기를 따르는 자들이 주님 때문에 사람들에게 배척당할 것임을 아셨다.

주님을 따르는 자가 사람들에게 배척당하지 않을 수 없다. 내가 신앙을 가졌다는 것을 알게 되었을 때 내 옛 친구들 중 절반이 떨어져 나갔다. 그들은 내가 그들과 즐겼던 옛것들에 동참하지 않고 그것들을 용납하지도 않는 것을 알고는 분노했다.

그들은 내가 그들을 판단하거나 비난한다고 느꼈다. 이런 현상은 보편적으로 나타난다. 회심한 사람들은 배척당하지 않을 수 없다. 회심하게 되면, 누가 진정한 친구인지를 즉시 알게 된다.

교회의 교제에 참여함

교회는 그리스도인의 삶에서 중심이 된다. 우리가 회심하면 하나님께서는 모든 거듭난 사람들의 모임인 ‘보편교회’ 안에 우리를 집어넣으신다. 그리고 각각의 지역교회들은 모든 신자들을 위한 ‘영적 가정’이다.

때때로 그리스도인이 자기에게 맞는 지역교회를 찾는 데 어려움을 겪기도 하지만, 내 경험으로 볼 때 신자들의 공동체를 찾아 그것에 동참하는 것이 그리스도인들의 자연스러운 본능이다.

교회에서 우리는 하나님을 예배하고 찬양하고 섬기는 법을 배운다. 우리가 다른 사람들과 교제하며 일할 때 우리의 모난 부분들이 많이 깎여져 나간다.

완전한 교회나 교단이 없지만, 우리는 결국 ‘영적 가정’이라고 부르기에 적당한 교회를 찾게 된다. 이렇게 하는 데 시간이 걸리기도 하지만, 거듭난 사람은 이런 교회를 찾을 때까지 쉬지 않는다.

신자가 자기의 교회에 충실하고 가능한 한 열심히 예배에 참석하고 교회 안에서 봉사의 방법을 찾는 것이 중요하다. 세례는 교회 안에서 거행되어야 한다. 주님의 만찬을 기념하는 것도 교회 안에서 이루어져야 한다.

회심한 사람이 교회와 관련되는 것을 피하는 경우를 이따금 볼 수 있다. 대개 이런 사람에게는 나름대로 깊은 사연이 있다. 하지만 언제나 나는 이런 사람에게 사람들과의 불화를 잊어버리고 그들을 용서하고 서로 간의 차이점을 인정하고 교회를 찾아서 활동하라고 설득한다.

복음을 증거함

예수님의 ‘은밀한’ 제자라는 것은 없다. 그분을 믿는 믿음을 다른 사람들과 나누는 것이 지극히 자연스러운 일이다. 회심한 사람은 다른 사람들, 즉 가족, 친구, 직장 동료, 더 나아가 온 세상 사람들이 그리스도에 대한 복된 소식을 듣고 깨닫기를 원하게 된다.

복음을 혼자만 소유하려고 하지 않는다. 성숙한 그리스도인은 어떤 식으로든 신앙을 다른 사람들과 공유하려고 애쓴다. 우리 모두가 전문적 전도자가 되도록 성령의 은사를 받은 것은 아니지만, 예수님은 우리 모두를 그분의 증인으로 부르셨다.

그리스도의 충만함까지 성장함

우리는 최고의 기준까지 올라가도록 부름 받았다. 즉,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이 충만한 데까지”(엡 4:13) 이르도록 부름 받았다.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이 성숙해지는 과정이 이 세상에서 완전히 이루어지는 것은 아니지만, 이 과정은 평생 발전한다. 그리고 이 과정에서 우리는 고통을 겪을 수도 있다.

이 과정을 쉽게 설명해줄 만한 좋은 비유가 생각난다. 우량 기업의 주가 지수를 장기간에 걸쳐 그래프로 나타낸 것을 보라. 그 그래프는 자주 오르락내리락할 것이다. 때로는 폭등하기도 하고 또 때로는 폭락하기도 하지만, 장기적으로 보면 위로 올라간다.

물론 때로는 완전히 바닥으로 곤두박질할 때도 있다. 또 다른 비유를 들어보자. 권투선수가 강펀치를 맞고 바닥에 쓰러지기도 하지만(성경은 우리를 운동선수에 비유하기도 한다) 다시 일어나 싸움을 계속한다.

우리는 우리 삶 속의 죄를 처리하고, 세상에 살면서 겪는 좌절을 극복한다(우리는 세상 안에서 살지만 세상에 속한 것은 아니다, 요 15:19). 하지만 이것이 전부는 아니다. 또한 우리는 악한 세력에 대항하여 영적 싸움을 전개한다(엡 6:10-20).

드리는 법을 배움

인간은 본능적으로 주기를 싫어하고 받기를 좋아한다. 이런 인간의 뿌리 깊은 본능에 정면으로 도전하는 것이 복음이다. 우리는 하나님께 재물을 드려야 한다.

십일조는 기본이고, 그 외에 헌금을 또 드려야 한다. 우리는 감사하는 마음으로 드려야 한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베푸신 충만한 자비에 감사하는 마음으로 드려야 한다.

나는 드리는 것이 참으로 힘들었다. 내가 처음으로 드릴 수 있게 된 계기를 나는 무척 소중하게 기억한다. 드리는 법을 배운 것이 내 신앙이 성장하는 데 핵심적 역할을 했다.

요한이 증거하는 회심한 자의 징후들

사도 요한은 우리가 ‘요한일서’라고 부르는 편지에서 그리스도인의 삶의 본질에 대해 1세기의 그리스도인들에게 말해주었다. 요한의 교훈을 간단히 요약해보는 것이 이 장(章)의 결론으로서 아주 유용할 것이다. 요한은 우리가 하나님의 계명에 순종하면 그분을 아는 것이라고, 즉 우리가 거듭난 것이라고 가르친다.

우리가 그의 계명을 지키면 이로써 우리가 저를 아는 줄로 알 것이요 요일 2:3

이와 동일한 진리가 몇 절 뒤에 다시 언급된다.

저 안에 거한다 하는 자는 그의 행하시는 대로 자기도 행할지니라 요일 2:6

예수님의 계명에 복종하고 그분이 행하신 대로 행하는 것이 ‘아가페’(agape)이다. ‘사랑’이라는 뜻의 단어 ‘아가페’는 신약에 사용된 헬라어이다. 이 단어를 이해하려면, 무엇이 ‘아가페’인가를 설명하는 것보다 무엇이 ‘아가페’가 아닌가를 설명하는 것이 더 좋을 것이다.

감정이나 감정 중심적 사랑은 아가페가 아니다. 욕구나 정욕도 아가페가 아니다. 심지어 친구 간의 우정도 아가페가 아니다. 아가페는 다른 사람에게 가장 큰 유익이 돌아가도록 행동하는 것이다. 이것을 가장 잘 표현한 것은 “무엇이든지 남에게 대접을 받고자 하는 대로 너희도 남을 대접하라 이것이 율법이요 선지자니라”(마 7:12)라는 예수님의 말씀이다.

그리스도인은 그의 형제를 사랑해야 한다(요일 2:10,11 ; 3:11 ; 4:7). 반대로 “이 세상이나 세상에 있는 것들을 사랑하지 말아야”(요일 2:15) 한다. 그리스도인은 죄 안에 계속 머물러서는 안 된다.

그(예수님) 안에 거하는 자마다 범죄하지 아니하나니 범죄하는 자마다 그를 보지도 못하였고 그를 알지도 못하였느니라 요일 3:6

요한은 그리스도인이 따라야 할 계명을 명확히 밝혀준다.

그(하나님)의 계명은 이것이니 곧 그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믿고 그가 우리에게 주신 계명대로 서로 사랑할 것이니라 요일 3:23

아마 다음 구절이 회심에 대한 가장 핵심적인 표현일 것이다.

우리에게 주신 성령으로 말미암아 그(하나님)가 우리 안에 거하시는 줄을 우리가 아느니라 요일 3:24

요한일서에 나타난 회심의 징후들을 요약해 말하자면 ‘구원을 위해 예수님을 믿고, 형제와 자매를 사랑하며, 죄를 버리는 것’이라고 표현할 수 있다. 회심하지 못한 자들은 이런 것들에 관심이 없고, 오히려 이런 것들을 경멸한다.

이런 것들이 우리 삶에서 나타나면 우리는 거듭났고 예수께서 우리 안에서 사시는 것이다. 그런데 이것을 확증하는 분은 오직 신자 안에 거하시는 성령님뿐이다. 그렇기 때문에 사도 바울이 “성령이 친히 우리 영(靈)으로 더불어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인 것을 증거하시나니”(롬 8:16)라고 말한 것이다.

다시 말하지만, 회심한 사람은 구원을 위해 예수님을 믿고, 다른 사람들을 향해 새로운 사랑의 태도를 가지며, 죄로부터 돌이키기를 원한다.

거듭난 신자는 성장한다

이제까지 내가 회심한 사람들이 보여주는 모든 징후들을 다 언급한 것은 아니다. 뚜렷한 징후들 중 일부를 언급했을 뿐이다. 그러나 회심했다고 하면서도 일정 기간이 지났는데도 이런 징후들이 나타나지 않는다면 정말로 회심했는지 검토해보는 것이 좋을 것이다.

물론, 모든 징후들이 어떤 한 시기에 그리스도인의 삶에서 전부 나타나야 한다는 뜻은 아니다. 또한, 그것들이 모두 거리낌 없이 순조롭게 나타나야 한다는 뜻도 아니다. 지금도 나는 때때로 신앙생활에서 갈등을 겪는다. 영적 싸움이 치열하다보니까 내가 패한 적도 한두 번 있었다.

나는 그리스도인의 삶이 의무와 수고로 가득한 것이라고 말하고 싶지 않다. 예수님을 섬기는 것은 최고의 특권이며 기쁨이다. 이것과 비길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전혀 없다. 만유(萬有)를 지으신 하나님을 섬기고 사랑하고 경배하는 것 앞에서 다른 모든 것은 무색해진다.

참된 회심의 징후들 또는 특징들은 초자연적으로 일어난다. 요한복음 3장에서 예수께서 ‘거듭나다’라는 표현을 사용하신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니다. 인간이 태어나면 성장하듯이 거듭난 신자도 그리스도의 충만하심의 정도에까지 성장하게 된다(엡 4:13).

목회자로서 나는 교인들이 영적인 성장을 시작하기를 초조한 마음으로 기다린 적이 많았다. 내가 여러 가지 제자화(弟子化) 계획을 가지고 노력했지만, 결국 그들은 그들 나름대로의 속도로 성장했다.

이런 것을 보고 나는 ‘하나님께서’ 자신의 자녀들을 성장하게 하신다고 결론을 내렸다. 그들이 아무리 완고하다 할지라도 말이다. 하나님께서는 선한 일을 시작하시고 또 이루신다. 우리는 하나님이 만들어내시는 작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