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각성운동이 일어났던 18세기의 위대한 설교자들, 즉 조나단 에드워즈, 길버트 테넌트, 조나단 디킨슨, 존 웨슬리, 조지 휫필드, 사무엘 데이비스 같은 사람들은 내게 큰 감동을 주었다. 이 장(章)은 이 사람들 중 한 명인 조나단 디킨슨의 설교 ‘중생(重生)의 신학’의 요약이며, 또 그것에 대한 논의이다.
이 설교는 미국의 제1차 대각성운동이 절정에 달했던 1741년에 씌어져 뉴저지(New Jersey)의 엘리자베스타운장로교회에서 선포되었다. 뛰어난 청교도 설교자들 중 한 사람으로서 프린스턴대학교 초대 총장을 지낸 디킨슨(1688~1747)은 그의 시대의 온건한 칼빈주의자들의 견해에 근거하여 회심의 일반적 과정을 설명했다.
우리가 이 회심의 단계들에 주목하는 이유는 복음주의자들의 표준적 모델과 찰스 피니와 그의 추종자들이 발전시킨 ‘방법’의 한계를 넘기 위함이다. 이 회심의 단계들은 16세기의 종교개혁가들과 또 그 이전의 종교개혁가들이 믿었던 ‘역사적 복음주의적 회심관(回心觀)’에 더 가깝다.
내가 볼 때, 성경에서 발견되는 회심의 신학을 더욱 정확히 반영하는 것은 최근에 발전된 회심관이 아니라 디킨슨이 말한 회심의 단계들이다.
이 장(章)의 내용 가운데 일부는 이 책의 다른 곳에서도 언급했지만 디킨슨의 설교에 나오기 때문에 사고의 흐름을 끊지 않으려고 그대로 이 장에 담게 되었다(참고로 다음 단계들의 제목은 내가 단 것이다).
성령님은 사람에게 그 자신의 비참한 상태를 있는 그대로 보게 하신다. 예수님은 “그(성령님)가 와서 죄에 대하여, 의(義)에 대하여, 심판에 대하여 세상을 책망하시리라 죄에 대하여라 함은 저희가 나를 믿지 아니함이요”(요 16:8,9)라고 말씀하셨다.
회심하지 못한 사람들은 변명하고 진실을 덮으려고 안간힘을 쓴다. 그들은 자기들의 죄가 드러날까봐 하나님의 빛으로 나오기를 두려워한다. 그들은 하나님의 존재를 부인하면서도, (대개는 무의식 속에서) 하나님의 진노와 심판을 두려워한다.
그러므로 죄인을 알고 진리를 말할 수 있는 권세를 가지신 분이 죄를 깨닫게 하는 일을 하셔야 한다. 성령께서 죄 사함을 받지 못하면 사망과 지옥이 있을 뿐이라는 진리를 죄인에게 말씀해주시는 것은 하나님의 자비로운 사랑 때문이다.
바울이 말했듯이 죄인들은 허물과 죄로 죽어 있기 때문에(엡 2:1 ; 골 2:13 참조) 성령께서 그들에게 그들의 상태가 어떤지를 보여주셔야 한다.
회심하지 못한 자들은 죄 때문에 눈이 멀고 죽어 있기 때문에 자기들 스스로 지옥의 형벌을 면할 수 없다는 것을 깨닫지 못한다. 더 나쁜 것은, “이 세상 신(神)이 믿지 아니하는 자들의 마음을 혼미케 하여 그리스도의 영광의 복음의 광채가 비취지 못하게 한다”(고후 4:4).
불신자들은 영적으로 죽어 있기 때문에 예수님이 누구신지, 그분이 십자가에서 무엇을 이루셨는지를 알지 못한다. 복음을 전해본 사람들은 “십자가의 도(道)가 멸망하는 자들에게는 미련한 것”(고전 1:18)이라는 사실을 뼈저리게 느낀다.
나도 불신자였을 때에는 십자가의 도를 미련한 것으로 여겼다. 그때의 일이 아직도 생생하다. 믿음을 가진 이후 나는 십자가의 도를 미련하게 여기는 불신자들을 수없이 만나보았다.
“육(肉)에 속한 사람은 하나님의 성령의 일을 받지 아니하나니 저희에게는 미련하게 보임이요 또 깨닫지도 못하나니 이런 일은 영적으로라야 분변함이니라”(고전 2:14)라는 말씀은 절대적으로 진리이다.
하나님의 영(靈)은 사람들로 하여금 그들이 자신들의 영적 문제를 전혀 해결할 수 없다는 것을 깨닫게 하신다. 디킨슨은 ‘굴욕’(humiliation)이라는 용어를 사용했는데, 이것은 예수님을 의지하지 않고 자신의 노력과 지혜로 영적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고 믿는 사람들을 성령님이 낮추실 때 그들이 느끼는 감정을 의미한다.
디킨슨에 따르면, 많은 사람들이 굴욕을 경험하면서도 “자기 의(義)를 세우려고 힘써 하나님의 의를 복종치 아니한다”(롬 10:3). 때로는 굴욕감이 너무 크기 때문에 “나는 어떤 자비도 얻을 자격이 없다”라고 생각할 수도 있다.
하지만 성령님의 도움이 있으면 사람은 결국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다”(롬 3:10)라는 진리를 깨닫게 된다. 또 “우리는 다 부정한 자 같아서 우리의 의(義)는 다 더러운 옷 같다”(사 64:6)라는 것도 알게 된다.
그리고 “만물보다 거짓되고 심히 부패한 것은 마음이라 누가 능히 이를 알리요”(렘 17:9)라고 고백하게 된다. 예를 들어 존 뉴턴(John Newton, 1725~1807. 찬송시 작가)은 “나 같은 죄인 살리신 주 은혜 놀라워”라고 노래했다. 그는 하나님께서 그의 속에 있는 반역의 마음을 아시면서도 그를 사랑하신 것에 매우 놀랐다.
회심한 사람은 자기 죄를 변명하고 합리화하는 짓을 중단하게 되며, 자신이 스스로를 변화시킬 수 없다는 것을 인정하게 된다. 사람들은 한 가지 죄를 끊어도 대신 다른 죄(예를 들면, 교만의 죄)에 빠진다. 하나님과 관계없이 이룬 의(義)는 오래가지 못한다.
예수께서 들려주신 ‘세리와 바리새인의 비유’는 선행(善行)을 통해 하나님을 기쁘게 해드리려는 시도가 절망을 낳을 뿐임을 잘 보여준다. 세리와 바리새인이 함께 성전에 기도하러 올라갔다. 바리새인은 세리를 멸시하며 자신을 의롭다고 여겼다.
바리새인은 율법을 꼼꼼히 지켰기 때문에 하나님께 자랑했다. 그러나 조국을 버리고 로마 편에 붙었기 때문에 동족에게 미움과 멸시를 받았던 세리는 눈을 들어 하늘을 보지 못하고 다만 가슴을 치며 그의 슬픈 마음을 드러냈다.
그리고 “하나님이여 불쌍히 여기옵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눅 18:13)라고 소리쳤다. 예수님은 이 불쌍한 세리에 대해 “이 사람이 저(바리새인)보다 의롭다 하심을 받고 집에 내려갔느니라”(눅 18:14)라고 선언하셨다.
우리는 바리새인처럼 되든지 아니면 세리처럼 된다. 세리처럼 되려면 우리의 방법으로는 지옥을 면할 수 없다는 것을 깨달아야 한다. 지옥을 면하는 유일한 길은 성령께서 주시는 깨달음이다.
자신의 절망적 상태를 깨달은 죄인은 예수 그리스도께 점점 관심을 갖게 된다. 청교도 설교자들 중 일부는 이런 관심을 ‘각성(覺醒)의 예비 단계’라고 불렀다. 이것은 ‘회심의 각성’ 바로 전 단계를 의미한다.
이 단계에서 비회심자(非回心者)는 “다른 이로서는 구원을 얻을 수 없나니 천하 인간에 구원을 얻을 만한 다른 이름을 우리에게 주신 일이 없음이니라”(행 4:12)라는 진리를 깨닫는다. 이제 이 사람은 자신의 한계선상(限界線上)에 서게 된 것이다.
이제 그는 오직 예수님만 의지하게 된다. 이제 그의 영적 문제는 결론을 맺어야 한다. 구원을 위해 예수님을 믿고 회심할 것인가, 아니면 예수님에게 등을 돌리고 (어쩌면, 영원히) 떠나갈 것인가?
내게 바로 이런 일이 일어났다. 나는 내 죄를 보았고, 예수님이 유일한 구주이심을 깨달았다. 나는 만일 예수님을 거부한다면 다시는 기회가 없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당시의 내 생각이 옳은지 틀린지 모르겠지만, 적어도 당시에 나는 그렇게 느꼈다.
사람이 자기가 원하면 언제라도 회심하겠다고 결심하여 지옥을 피할 수 있다는 생각을 조장하는 자는 마귀이다. 성령님이 회심하지 못한 사람을 예수님께 인도하셔야 하는데, 이런 일은 오직 그가 (주로, 말씀의 선포에 의해) 복음의 메시지에 접할 때 일어난다.
예수님은 “나를 보내신 아버지께서 이끌지 아니하면 아무라도 내게 올 수 없느니라”(요 6:44)라고 말씀하셨다. 하나님의 능력을 통하지 않고는 예수님이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심을 깨달을 자가 아무도 없다.
죽음을 눈앞에 둔 죄인을 위해 빨리 기도해주거나 어떤 종교적 의식(儀式)을 치르는 것은 (그가 죽음을 아무리 두려워한다 할지라도) 성경적 근거가 없다. 물론 주목할 만한 예외가 있는데, 그것은 예수님 곁에서 십자가에 달린 강도의 경우이다.
하나님께서 그의 마음을 열어주셨기 때문에 그는 예수께 “오늘 네가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눅 23:43)라는 말씀을 들었다. 하지만 죽음 직전의 회심은 예외적인 것이기 때문에 그것을 의지해서는 안 된다.
회심하지 못한 사람이 예수께 나아가 예수님의 신분과 사역에 근거하여 그분께 복종할 때 회심이 일어난다. 회심은 순간적으로 일어난다(회심이 순간적으로 일어나는가 아니면 일정한 과정을 거치면서 일어나는가 하는 문제는 오래 세월 논의의 대상이 되어왔다.
내가 볼 때, 회심, 즉 실제의 영적 출생은 순간에 일어난다. 다만 기억에 의존하여 회심의 체험을 회상하는 사람에게는 그것이 순간에 일어난 것으로 느껴지지 않을 수도 있다. 물론 회심 전후에 나름대로 과정이 있을 수 있다. 왜냐하면 회심이 진공상태에서 일어나는 것이 아니라 나름대로 어떤 사건들과 연관되어 일어날 수 있기 때문이다).
회심한 사람은 자기에게 회심이 일어났다는 것을 알지 못할 수도 있다. “나는 영접기도를 드릴 때 회심했습니다”라고 간증하는 사람들을 종종 볼 수 있다(그들이 실제로 그때 회심했든지 아니든지 간에).
하지만 구체적으로 언제 회심했는지를 그렇게 분명히, 그렇게 쉽게 확인하는 것이 언제나 가능한 것은 아니다. 진정으로 회심한 사람들 중 일부는 자기의 회심을 즉시 알게 된다. 하지만 진정으로 회심했다 할지라도 수개월 동안, 심지어 수년 동안 갈등하고 고민하다가 비로소 구원의 확신에 도달할 수 있다.
영접기도를 드리거나 ‘결신(決信)의 초청’에 응한 정확한 날짜와 시간을 아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자신이 회심하여 예수님 안에서 안전하다는 것을 아는 것이다.
사람이 회심하게 될 때 그는 무조건적으로 예수께 나아가 예수님의 만족케 하심을 믿고 (마치 광란의 폭풍우 가운데서 견고한 탑을 붙들듯이) 예수님을 붙든다. 바로 여기에 회심의 신비가 있다. 이것이 핵심이다. 이것을 인간의 말로 다 표현할 수는 없다.
무릇, 기적 앞에서 인간은 아무 말도 못하는 법이다. 성부 하나님께서 사람을 구주에게 인도하시어 그로 하여금 구주를 믿게 하신다. 이렇게 하여 하나님과 인간 사이의 간격(심연)이 메워졌다. 하나님께서 찢기고 비참한 피조물의 손을 잡아주심으로써 구원이 주어진 것이다.
우리는 은혜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는다(롬 3:24 ; 엡 2:8,9 ; 딛 2:11). 은혜는 하나님께서 아무 자격이 없는 인간에게 베푸시는 호의이다. 하나님은 아무 공로 없는 우리를 찾아오시어, 자신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로써 거저 죄 사함을 허락하신다.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우리를 대신하여 죽으셨다. 예수님이 우리의 죄와 형벌을 짊어지고 보혈을 흘리시어 우리 죄는 덮어졌고 하나님의 공의의 의로운 요구가 충족되었다. 이것이 은혜이다.
믿음, 즉 신뢰는 하나님의 은혜에 인간이 응답하는 것이다. 믿음으로써 우리는 예수께 나아가 하나님의 은혜를 받는다. 이것도 하나님의 선물이다(롬 3:24).
하나님의 능력에 의해, 우리의 모든 죄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씻긴다. 하나님의 능력에 의해, 죄인이 중생(重生)하고 회심하고 거듭나며(이 세 표현은 사실 동의어이다), 죄인 안에 하나님의 영이 내주(內住)하신다. 이렇게 회심한 사람의 이름은 ‘어린양의 생명책’에 영원히 기록된다(계 21:27).
회심 후에, 하나님의 영은 신자의 삶 안에서 은혜의 사역을 수행하신다. 이것이 성화(聖化)의 과정이다. 성화는 하나님을 섬기는 일을 감당하도록 신자를 구별하는 것이다. 회심한 사람은 그리스도와의 연합을 누린다(롬 6:5). 그는 포도나무이신 그리스도 안에 거하여 열매를 맺을 수 있다(요 15:5).
신자는 세상 안에 있지만, 세상에 속하지는 않는다(요 15:19 ; 17:14). 신자는 그리스도 안에서 완전하다. 하지만 그는 여전히 죄인으로 머물기 때문에 날마다 죄를 고백하고 그리스도의 보혈과 의(義)를 의지해야 한다(요일 1:8-2:2).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는 거룩하게 되었고 의롭다(고전 1:30 ; 6:11). 그리스도는 우리의 거룩함이시다. 성화(聖化)를 이룰 수 있는 다른 방법은 없고, 오직 그리스도의 의(義)와 거룩함을 믿고 의지하는 것이 있을 뿐이다.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셨다.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니 저가 내 안에, 내가 저 안에 있으면 이 사람은 과실을 많이 맺나니 나를 떠나서는 너희가 아무것도 할 수 없음이라 요 15: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