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심은 개인적이고 내적(內的)인 경험이다. 회심이 이런 주관적인 것이기 때문에 회심을 구체적 용어로 분석하는 것은 쉽지 않다. 앞 장(章)에서 살펴본 회심의 객관적 조건은 동일하지만(“예수 그리스도는 어제나 오늘이나 영원토록 동일하시니라”, 히 13:8), 각 사람의 개인적 회심은 서로 다르다.
신학의 거의 모든 부분들이 논쟁의 대상이 되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회심의 주관적 측면에 대한 논의는 상당 부분 회심의 본질적 신비에 대한 논의이다.
웹스터 사전은 ‘신비’를 “오직 계시로써만 알 수 있고 완전히 이해할 수는 없는 종교적 진리”라고 정의(定義)한다. 회심은 신비이다. 나는 이 책 2장의 끝부분에서 언급한 대로, 미켈란젤로의 그림〈천지창조〉에 표현된 하나님과 인간 사이의 간격을 회심의 신비에 대한 상징으로 해석한다.
그 그림에서 하나님과 사람이 서로 손을 내밀었지만 두 손가락이 서로 닿지 않는다. 회심은 이 두 손가락 사이의 간격을 메우는 신비로운 교량(橋梁) 같은 것이다.
이 신비를 논할 때 우리는 종종 어려움을 느낄 수 있다. 왜냐하면 회심이 일어나는 방법을 우리가 알 수 없고 통제할 수도 없다는 것을 인정해야 하기 때문이다.
예를 들면 복음을 전하는 자가 무엇을 하든 간에 그는 그 누구도 거듭나게 할 수 없고, 이런 거듭남이 실제로 어떻게 일어나는지 설명할 수도 없다. 복음을 전한 후에 그가 할 수 있는 최선의 노력은 “주 예수를 믿으라 그리하면 너와 네 집이 구원을 얻으리라”(행 16:31)라고 말하는 것이다.
하나님의 영(靈)이 일하실 때 사람들의 마음속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는가 하는 것은 신비이기 때문에 우리는 이것에 대해 추측할 수 있을 뿐이다. 내 경우를 말하자면, 앞에서도 언급했듯이 나는 내가 하나님 앞에서 죄인이며, 하나님과 분리된 죄인이라고 느꼈다.
또한 나는 내가 설교자나 다른 그리스도인들로부터 판단을 받는다고 느꼈다. 나는 그들을 피하려고 했지만, 그러면서도 교회로 끌렸다(교회로 끌렸던 이유는 내가 들을 수 있는 말씀을 듣고 싶었기 때문이다). 이것은 좀 이상한 일이었다. 만일 누가 그 이유를 물었다면 나는 설명하지 못했을 것이다.
나는 내가 지옥의 형벌을 면할 수 없는 존재로서 판단을 받는다고 느끼면서도 예수께 끌렸다. 물론 이런 일이 있기 오래전부터 나는 예수님에 대해 들어왔고, 때때로 친구들과 더불어 기독교에 대해 대화를 나누었다. 하지만 그때의 경우는 완전히 달랐다. 내게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 완전히 알지 못하면서도 나는 예수님이 구주(救主)시라고 강하게 느꼈다.
나는 그분께 끌리면서도 동시에 거부감을 느꼈다. 내 마음속에서 일어나는 이런 일을 표현할 수 있는 능력이 내게 있었다 할지라도 그것에 대해 대화를 나눌 사람이 주변에 없었다.
여러 달 동안 내 마음속에서는 내면적 전투가 계속되었다. 그러다가 결국 어느 순간에 그 전투가 끝났고, 예수님이 나를 구원하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런 경험이 정확히 어떤 것이었는지는 지금도 설명할 수 없다. 다만 당시 나는 나의 내면적 싸움이 결국 끝났다고 느꼈다.
찰스 대번포트라는 사람이 당시 우리 집 건너편에 있는 집에 살고 있었는데, 그 역시 페어필드의 침례교회에 다녔다. 그 사람과 나는 늘 논쟁을 벌였는데, 주로 나의 회심 전에 그랬다(물론, 나의 회심 후에도 논쟁은 있었다).
나는 기독교가 말도 안 되는 것이라고 증명하기 위해 생각해낸 기발한 질문들로써 그를 궁지에 몰아넣으려고 애썼는데, 그러면서 내 자신이 궁지에 몰려 방어적 태도를 취하기도 했다.
그런데 지금 그때를 돌이켜보면 놀라운 사실이 있다. 그것은 내가 그전에는 기독교에 관심이 없었는데 나도 모르게 관심이 생겼다는 것이다. 기독교에 대한 당혹스러운 질문들도 어쨌든 관심이 있으니까 할 수 있었던 것이다. 어떻게 그런 일이 일어났을까? 이제 와서 생각해보면, 그것은 하나님 아버지께서 나를 그분의 아들(예수님)에게로 인도하신 것이었다.
당시 나는 논쟁할 때 종종 방어적인 논리를 폈고 또 화를 냈다. 그 후 내가 주변에서 보니까, 기독교에 대해 반대 논리를 펴는 사람들이 이런 식의 태도를 많이 보였다. 그런데 많은 경우, 그리스도인들은 그들의 이런 태도에 어떤 의미가 담겨 있는지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다.
이것은 안타까운 일이다. 왜냐하면 사실 그들은 하나님을 찾고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것을 꿰뚫어보지 못하는 그리스도인들은 그들의 속마음을 이해해주지 못하고 오히려 그들을 배척한다.
나는 회심하기 직전의 많은 사람들과 뜨거운 논쟁을 벌인 적이 많다. 뭐라고 표현하기 힘든 것이 그들의 마음속에서 일어나고 있었는데, 나는 그것이 영적 싸움일 것이라고 생각한다. 이 싸움에는 하나님의 원수인 마귀가, 아니 더 나아가 온 피조 세계가 개입하여 사람들이 그리스도를 만나지 못하게 하려는 것 같다. 이것에 대해 바울은 이렇게 말했다.
그중에 이 세상 신(神)이 믿지 아니하는 자들의 마음을 혼미케 하여 그리스도의 영광의 복음의 광채가 비취지 못하게 함이니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형상이니라 고후 4:4
궁극적 싸움은 영적 싸움이다. 이것은 육체적 생명이냐 죽음이냐의 문제가 아니라 천국이냐 아니면 지옥이냐를 결정짓는 싸움이다. 만일 예수께서 자신의 죽음과 부활을 통해 옛 원수에게 승리를 거두지 못하셨다면, 인간은 영적 싸움에서 질 수밖에 없을 것이다. 그렇기에 요한이 “하나님의 아들이 나타나신 것은 마귀의 일을 멸하려 하심이니라”(요일 3:8)라고 말했던 것이다.
내 회심은 다른 모든 사람들의 회심과 다르다. 각 사람의 회심은 독특하다. 그렇지만 회심에 대한 많은 사람들의 간증들을 들어보면 분명한 공통점이 반복적으로 나타난다. 그것은 죄를 깨닫고 예수께 점점 끌린다는 것이다.
어떤 사람들은 “나는 ‘극적인’ 회심의 체험이 없었는데 혹시 내가 회심하지 못한 것은 아닌가요?” 하며 불안해한다. 하지만 나 역시 ‘극적인’ 회심의 체험은 없었다.
어떤 사람들은 자기가 회심한 구체적 시간을 알고 있지만, 또 어떤 사람들은 자기가 언제 회심했는지 말하지 못한다. 회심할 때 어떤 사람들은 울었고, 어떤 사람들은 웃었으며, 또 어떤 사람들은 오랜 시간 힘든 경기를 치른 후에 지쳐 쓰러지듯이 지쳐서 잠이 들었다.
어떤 사람들은 자기들이 거듭났다는 것을 분명히 알게 되었다. 어떤 사람들은 자기들이 회심할 때 양쪽 어깨를 누르고 있던 무거운 짐이 떨어져 나가는 것 같았다고 말한다. 또 많은 사람들은 “분명히 내게 무슨 변화가 일어났습니다.
왜냐하면 그전에는 그렇지 않았는데, 그때부터는 예수님과 관계된 것, 즉 성경 읽고 기도하고 교회 가는 것이 좋아졌기 때문입니다”라고 말한다.
나의 회심도 그랬다. 나를 아는 사람들의 입에서 “저 차가운 성격의 필폿이 아주 뜨거운 성격의 교인들과 함께 교회에서 찬송가를 부르는 일은 절대 일어나지 않을 것이다”라는 말이 나올 정도로 본래 나는 기독교에 관심이 없었다.
하지만 나 자신도 놀랄 정도로 내게는 변화가 생겼고, 나는 내 변화를 받아들였으며, 내가 원하는 곳에 있다고 생각했다. 내 가족이나 친구들의 반대가 내게 다소 상처를 주긴 했지만, 내가 그리스도를 따르는 것을 막지는 못했다.
오랜 세월 목회를 해온 내가 단언할 수 있는 것은, 사람마다 회심하는 모양이 전부 다르다는 것이다. 중생(重生)의 체험 후에 온갖 어려움을 다 당하는 사람들도 있는 것 같다. 또 어떤 사람들은 회심 후에 상당 기간 동안 평안하다가 후에 (때로는) 아주 심하게 흔들리는 것 같다. 또 어떤 사람들은 회심 후에 믿음에서 떠나 방황하다가 다시 돌아와 (때로는) 더 큰 믿음의 소유자가 되기도 한다.
큰 죄인으로 소문난 사람들이 회심하여 그들의 죄악 된 행위를 버리고 일정 기간 동안 신앙생활을 잘할 때, 그들은 자기들이 다시는 과거의 죄에게 유혹을 받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그들은 미래에 또 유혹을 받아 영적 싸움에 휘말리게 될 것이다.
이런 다양한 경우들에서 볼 수 있듯이 그리스도인들의 경험, 그들이 믿음을 갖게 되는 과정, 그리고 그들이 겪는 유혹과 영적 싸움은 사람마다 서로 다르다. 하지만 그들이 진정으로 거듭났다는 사실은 분명하다.
나도 분명한 방법, 예측 가능한 결과, 깔끔하고 논리 정연한 것, 체계적인 것을 좋아하는 사람이다. 하지만 회심의 문제에 있어서, 나는 성령께서 사람들의 삶에 어떤 방식으로 개입하여 일하시는지를 예측할 수 없다.
종종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께서 어떻게 일하시는지를 알고 또 그것을 통제하고 싶은 유혹을 받는다. 그러다보니까 어떤 규칙적인 것이나 어떤 방법을 찾으려고 애쓴다. 하지만 성경은 회심의 신비를 설명하려는 노력을 지지하지 않는다.
“선생들아 내가 어떻게 하여야 구원을 얻으리이까”(행 16:30)라고 묻는 빌립보 감옥의 간수에게 바울과 실라는 그가 믿음에 이를 수 있는 구체적 방법에 대해 말하지 않았다. 다만 “주 예수를 믿으라 그리하면 너와 네 집이 구원을 얻으리라”(행 16:31)라고 말했을 뿐이다.
여기서 ‘믿으라’로 번역된 헬라어 동사는 ‘부정과거(不定過去) 명령법’으로 쓰였는데, 그들이 이 동사를 사용했다는 것은 간수가 그때 그 자리에서 믿고 구원받을 것이라고 기대했다는 것을 의미한다.
신약에 기록된 회심에 관한 어떤 구절에서도 회심의 구체적 방법은 제시되지 않는다. 신약은 “회개하고 고백하고 믿어라”라고 말할 뿐이지, 어떻게 회개하고 고백하고 믿어야 할지에 대해서는 말하지 않는다.
“자연은 진공상태를 싫어한다”라는 말이 있다. 내가 볼 때, 인간의 본성도 어떤 신앙 체계 안에 진공이 생기는 것을 아주 싫어한다. 회심의 경우에도 많은 사람들이 이 진공처럼 보이는 것을 메우려고 시도했다.
그리하여 사람들로 하여금 영접기도를 따라 하게 만들거나 설교단 앞으로 나오게 하거나, 다른 여러 테크닉을 사용했다. 그러나 예수님을 영접할 때 사용해야 할 기도가 성경에 나오는가? 예수님을 영접하는 사람이 설교자 앞으로 나오거나 손을 들었다는 기록이 성경에 나오는가?
물론 사람들이 영접기도를 하거나 설교단 앞으로 나오거나 손을 들거나 또는 세례를 받은 후에 회심할 수도 있다. 실제로 어떤 방법을 통해서든 회심이 일어날 수 있는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어떤 방법을 사용했다고 해서 회심이 자동적으로 일어나는 것은 아니다. 그리고 흔히 교회에서 사용되어온 방법들은 성경의 분명한 지지를 받지 못한다.
내가 볼 때, 우리의 교회들에 속한 어떤 사람들은 자기들이 이런 방법들을 통과했기 때문에 회심했다고 믿는다. 나는 이런 사람들이 위험한 상태에 있다고 믿는다. 한 걸음 더 나아가 감히 말하자면, 우리 교회들의 어떤 목회자들은 자기들의 이름이 ‘어린양의 생명책’에 기록되어 있다고 생각하지만 사실은 그렇지 않다.
대체적으로 말해서, 회심의 객관적 조건은 성경이 가르치는 교리들과 일치한다. 나는 나의 첫 설교를 하기 전에도 이런 교리들이 무엇인지 확실히 알았다. 나는 내가 그것들을 알기 때문에 사람들을 회심하게 만드는 방법도 내 마음대로 통제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지난 주일에는 다섯 명의 결신자를 얻었다”라는 식의 자랑을 늘어놓기도 했다. 내 생각이 옳다고 확신했던 나는 나를 거쳐 간 사람들이 모두 거듭났다고 믿었다.
그러나 그런 결신자들 중 많은 사람들이 머지않아 교회를 떠났다. 그럴 경우 나는 “그 사람들을 상대로 사후(事後) 관리를 하지 않아서 그들이 떠났다”라는 손쉬운 변명을 내세웠다. 이렇게 하면 모든 것이 설명되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많은 경우를 좀 더 구체적으로 정확히 조사해보니까, 그들은 세례를 받고 우리 교회에 등록했지만 어떤 교리적 문제에 걸리거나 어떤 불쾌한 일로 인하여 우리 교회를 떠났고 다른 교회에도 나가지 않았다.
나는 “그들에게서는 영적 생명이나 영적 성장이 도무지 나타나지 않았다”라고 말하며 그런 일을 마귀의 탓으로 돌리거나 적당한 구실을 내세워 잊어버렸다.
설교자가 회심을 강조하면서 사람들에게 구원의 확신을 가지라고 설교할 때, 이 책에서 논의되는 것들 중 많은 것들의 의미가 분명히 드러난다. 구원을 강조하는 설교를 하는 사람은 이내 어려움에 봉착하여 당혹감을 느낄 수도 있다.
진정으로 회심한 사람들은 이런 설교를 통해 도전을 받을 때 즐거워할 것이다(물론, 처음부터 다 그런 것은 아니다). 반면 회심하지 못했으면서 회심했다고 착각하고 있는 사람들은 이런 설교를 들으면 매우 불편해하거나 심지어 화를 낼 것이다.
한편, 설교자가 구원을 확신한다는 사람들의 말을 다 믿어주고 그들에게 자기 자신이나 교회에 대해 확신을 갖게 해주면, 그들은 그를 좋아하고 칭찬할 것이다. 그리고 거짓 회심이 있을 수 있다는 것을 알지 못한 채 편안한 마음으로 집에 돌아가 잠자리에 누울 것이다.
그렇다면 복음전도자가 “주 예수를 믿으라. 그리하면 구원을 얻으리라!”라는 말 이외에 또 무엇을 할 수 있는가? 주 예수를 믿는다는 것은 죄 사함과 구원을 얻기 위해 오직 그분만을 의지하고 그분을 주(主, 주인님)와 그리스도로 인정하여 복종하는 것이다. 그렇다! 이것이 복음이다.
그러나 지옥을 면할 수 없는 상태에 빠져 있는 사람이 어떻게 예수님을 믿는가? 이런 사람이 무엇을 해야 하는가? 나는 모른다. 29년 동안 나는 그것을 안다고 생각했지만, 이제 나는 회심을 일으키는 어떤 방법도 없다고 믿는다.
스펄전은 복음을 증거하는 설교를 오랜 시간 열심히 했지만, 소위 ‘결신(決信)의 초청’을 하지 않았다. 청중에게 “예수님을 영접하기를 원하는 사람은 손을 드십시오(또는, 앞으로 나오십시오)”라는 식의 얘기를 하지 않았고, 그들에게 영접기도를 드리라고 말하지도 않았다.
단지 “회심의 문제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기를 원하는 사람은 저나 우리 교회의 집사님들을 찾아오십시오”라고 말했을 뿐이다. 그리고 스펄전은 그의 교회에 나오겠다고 말하는 사람들을 개별적으로 면담하면서 그들의 회심에 대해 대화를 나누었다. 그는 회심하지 못한 사람들에게 예수께 나아가 그분을 믿어 구원을 얻으라고 강하게 설득했다.
성령께서 우리의 죄를 깨닫게 해주시고 예수님을 주와 구주로 계시해주셨기 때문에, 우리는 죄 사함과 구원을 얻기 위해 예수께 나아갈 때 어떤 인간이나 단체가 아닌 바로 예수님을 우리 구원의 근원으로 믿는다.
그러면 “앞으로 나와 예수님을 주와 구주로 영접하십시오”라고 초대하는 것은 잘못된 것인가? 복음주의적 교회 대부분에서 이런 방법을 사용하지만, 이런 것이 성경에 나오는 것은 아니다.
내가 말하고 싶은 것은, 적어도 이런 방법을 사용하기 때문에 회심이 일어난다고 믿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회심은 아주 신비롭고 주관적인 것이기 때문에 우리는 성경적 선례도 없는 간단한 기도에 근거하여 사람의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사건을 판단할 수 없다.
나는 어떤 방법도 사용하지 않고 단지 사람들에게 “예수께 나아가 죄 사함과 구원을 얻으십시오”라고 권하는 것을 더 좋아한다. 이런 것이 참된 회심을 일으킨 경우들이 허다하다.
가장 노련한 목사가 가장 좋은 방법을 사용한다 할지라도 참된 회심이 일어나리라는 보장은 없다. 설교자는 복음의 객관적 진리를 전해야 한다. 그러면 성령께서 말씀을 듣는 자들에게 그 진리를 주관적으로 적용하실 것이다. 물론, 성령께서 그 진리를 적용하시는 방법은 우리가 이해할 수도 없고 통제할 수도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