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실로 회심했는가
PART1 당신 회심은 진짜인가?

4 예수님이 계시기에 당신의 회심이 가능하다

예수님은 누구신가?

참된 회심에 대해 논할 때 우리의 논의의 중심에 서야 할 분은 바로 예수님이시다. 그분이 누구시고 무슨 일을 하셨는지를 생각하면 나의 이 말이 이해될 것이다. 그리스도와 그분의 사역이 회심의 객관적 조건이다.

내가 회심했을 때 나는 예수님에 대하여 거의 아는 것이 없었다. 누군가 내게 그분에 대해 기초적인 것을 물어보았다면 나는 대답하지 못했을 것이다. 또한 나는 매우 순진했기 때문에 만일 이단이 접근했다면 그들의 교리에 속아 넘어갔을 것이다.

불신자가 복잡한 구원의 교리를 이해한다는 것은 드문 일이다. 복잡한 신학을 이해하지 못해도 구원을 얻을 수 있도록 정하신 하나님께 감사한다! 만일 복잡한 신학을 이해해야만 구원을 얻을 수 있다면, 지식을 통해 구원을 얻는다는 교리가 계속 발전했을 것이다(사실, ‘영지주의’라는 기독교 이단이 이런 주장을 했다). 그러나 정확한 교리적 지식만으로 회심한 사람은 아무도 없다.

예수님의 메시지에 대해 설명한 글을 모아놓으면 도서관을 다 채우고도 남을 것이다. 그러나 핵심만 추려서 이야기하자면 짧은 설교나 개인적 대화나 편지 한 통으로도 충분하다. 이제 이 장(章)에서는 예수님이 누구시고 무슨 일을 하셨는지에 대해 기본적인 사실들을 살펴보려고 한다.

구약에 나타난 메시아의 상징

예수님은 ‘임마누엘’(우리와 함께 계시는 하나님)이시다(사 7:14 ; 마 1:23 참조). 예수님은 육신으로 오신 하나님이시다. 예수께 나아가는 것이 곧 하나님께 나아가는 것이다. 예수님은 ‘메시아’(기름부음을 받은 자), 즉 오래전에 약속된 구원자이시다.

그분은 ‘전능하신 하나님’이요 ‘영존하시는 아버지’이시다(사 9:6). 그분이 성부 하나님은 아니시지만, 성부 하나님과 동일한 본질과 의지(意志)를 가지고 계신다.

위에서 말한 것들은 분명한 사실들이다. 하지만 A.D. 1세기의 유대 지도자들은 이런 것들을 몰랐다. 그들은 메시아가 정치적 및 군사적 지도자로 등장하여 기적을 베풀어 유대 민족을 로마의 압제에서 구해줄 것이라고 믿었다.

구약에는 메시아에 대한 서로 상충하는 상징들이 나온다. 하나는 다윗의 자손으로서의 메시아이고, 다른 하나는 요셉의 자손으로서의 메시아이다. 전자는 민족을 구하여 강력한 나라를 만든 다윗 왕처럼 영웅적 인물을 상징한다.

후자는 채색 옷을 입었던 요셉처럼 자신의 고난을 통해 민족을 구하는 ‘이사야서의 고난의 종’을 상징한다. 이런 메시아에 대한 묘사가 이사야서 53장과 시편 22편에 나오는데, 여기에는 메시아가 백성의 죄를 짊어지고 죽을 것이라고 예언되어 있다. 그러나 이 메시아는 또한 다윗처럼 자기 백성을 그들의 모든 원수들에게서 건지실 것이다.

요셉의 자손으로서의 메시아는 이미 오셨다(초림의 그리스도로서 오셨다). 이제 우리는 다윗의 자손으로서의 메시아를 기다리고 있다(재림의 그리스도를 기다리고 있다). 이것을 다르게 표현해보자.

메시아가 처음 오신 것은 동정녀 마리아가 베들레헴에서 예수님을 낳았을 때였다. 그런데 메시아가 두 번째로 오시는 때는, 다윗의 자손 메시아이신 이 예수께서 이 세대의 끝에 다시 이 땅에 돌아오실 때이다. 그분은 만왕(萬王)의 왕이요 만주(萬主)의 주로서 다시 오시어 하나님의 영원한 나라를 세우실 것이다.

예수님은 완전한 희생제물이시다. 그분은 우리를 죄에서 깨끗케 하기 위해 보혈을 흘리셔야 했다. 백성의 죄를 사하기 위해 짐승을 죽일 것을 요구한 유대의 희생제사 제도는 이것을 분명히 예표(豫表)했다.

예수님은 마지막 유월절 어린양이셨다. 애굽에 장자(長子)의 재앙이 내려졌을 때 이스라엘 백성이 죽음을 면할 수 있었던 것은 그들의 집 문설주에 피를 발랐기 때문이다.

예수님의 피는 사람들을 죽음에서 단번에 영원히 구원하신다. 이스라엘의 마지막 선지자 세례 요한은 예수님에 대해 “보라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양이로다”(요 1:29)라고 증거했다.

신약에 나타난 메시아의 상징

예수님은 육신이 되신 말씀이시다(요 1:14). 그분은 태초에 하나님과 함께 계셨다. 그분은 하나님의 영원한 아들이시다. 그분은 하나님이시며, 언제나 하나님이실 것이다. 예수님이 베들레헴에서 태어나실 때 그분의 존재가 시작된 것이 아니다.

베들레헴에서 태어나실 때 그분은 단지 육신을 취하셨을 뿐이다(우리는 이것을 ‘성육신’이라고 부른다). 바울은 예수님이 “자기를 비어 종의 형체를 가져 사람들과 같이 되셨다”(빌 2:7)라고 증거했다. 하지만 하나님의 아들이 ‘어떻게’ 육신이 되셨는지는 성경에 거의 언급되지 않는다.

예수님은 “보이지 아니하시는 하나님의 형상이시다”(골 1:15). 성부와 성자와 성령은 본질이 동일하시다. 우리는 성부(창조주)와 성자와 성령의 한 하나님을 만난다. 삼위일체 교리가 하나님의 계시인 성경에 나와 있지만 우리가 이 교리를 완전히 이해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삼위일체 하나님, 즉 ‘한 분이면서 세 분’이고 또 ‘세 분이면서 한 분’이신 하나님은 “이스라엘아 들으라 우리 하나님 여호와는 오직 하나인 여호와시니”(신 6:4)라는 말씀과 어긋나지 않는다.

이 성경구절에서 하나님을 서술하는 데 사용된 히브리어는 ‘에하드’(echad)인데, 이 단어는 본문에서 ‘하나’(one)로 번역되었다. 이 말은 하나님께서 ‘하나의 단일체’(a unit)시라는 의미가 되는데, 남편과 아내가 ‘하나의 단일체’인 것과 어느 정도 유사하다(창 2:24 참조).

남편과 아내는 두 사람이지만 ‘하나의 단일체’이다. 삼위일체 하나님은 세 위격(位格)이시면서 ‘하나의 단일체’이시다. 사도들 중 한 사람인 빌립이 예수께 “주여 아버지를 우리에게 보여주옵소서 그리하면 족하겠나이다”(요 14:8)라고 말씀드렸을 때, 주님은 “빌립아 내가 이렇게 오래 너희와 함께 있으되 네가 나를 알지 못하느냐 나를 본 자는 아버지를 보았느니라”(요 14:9)라고 말씀하셨다.

예수님이 성부는 아니시며, 성부가 성자는 아니시다. 빌립은 하나님을 알기를 원했다. 즉, 하나님이 누구신지를 알기를 원했다. 예수님은 그에게 자기를 보고 아는 것이 하나님을 보고 아는 것과 똑같다고 말씀하셨다. 왜냐하면 예수님 자신이 하나님, 즉 육신으로 오신 하나님이시기 때문이다.

요한은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요 1:14)라고 증거했다. 요한의 이 계시는 하나님께서 창세전에 정하신 영원한 계획을 증거한다.

베드로도 “그는 창세전부터 미리 알리신 바 된 자나 이 말세에 너희를 위하여 나타내신 바 되었느니라”(벧전 1:20)라고 말했다. 하나님께서 정하신 때가 되었을 때 예수님은 베들레헴에서 나셨다. 이것에 대해 바울은 이렇게 말했다.

때가 차매 하나님이 그 아들을 보내사 여자에게서 나게 하시고 율법 아래 나게 하신 것은 율법 아래 있는 자들을 속량(贖良)하시고 우리로 아들의 명분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갈 4:4,5

예수님은 아버지의 뜻에 복종하셨다

예수님은 구약에 기록된 ‘오실 메시아’에 대한 모든 예언을 성취하셨다. 다시 말해서 메시아의 본성, 출생, 사역, 삶, 그리고 죽음에 대한 모든 예언을 충족시키셨다. 예수님의 어머니 마리아는 성령의 이적으로 그분을 잉태했다.

그녀는 베들레헴에 있을 때 예수님을 낳았다. 예수님은 완전한 하나님이며 완전한 사람이셨고, 다른 모든 인간처럼 시험을 받으셨지만 죄를 짓지 않고 사셨다. 그분은 성부 하나님을 온전히 의지하심으로써 죄의 유혹에 저항하셨다.

예수님은 가족에 대한 의무를 다하셨다. 그리고 랍비가 가르침을 시작할 수 있는 30세 정도의 나이가 되셨을 때, 하나님나라가 가까웠다고 전파하셨다.

예수님의 주변에는 항상 많은 남자들과 여자들이 있었지만 그분은 오직 열두 명의 제자를 택하셨다. 그리고 자신이 떠난 후 그들이 사명을 제대로 감당하도록 그들을 3년 동안 훈련시키셨다.

이 땅에서의 사역이 끝나갈 때 예수님은 붙잡히시고, 부당한 재판을 받으시고, 매질과 채찍질을 당해 흉한 모습으로 변하시고, 굴욕을 당하셨다. 그분은 로마의 처형 방식인 십자가형으로 돌아가셨다. 하나님의 저주를 짊어지고 돌아가신 것이었다(신 21:23 참조).

이것은 성경의 예언을 온전히 이룬 사건이었다. 예수님은 “열두 영 더 되는 천사”(마 26:53)를 불러서 고난에서 벗어나실 수도 있었지만, 아버지의 뜻에 복종하여 로마 군사들의 손에 의해 십자가에 못 박히는 편을 택하셨다.

예수님은 무슨 일을 하셨는가?

예수님이 그 자신의 삶과 죽음과 부활을 통해 무엇을 이루셨는지를 이해하려면 예수님이 누구신지를 알아야 한다. 예수님이 하신 사역의 핵심적 요소들을 살피는 방법들 중 하나는, 그것들을 표현하는 데 흔히 사용되는 주요한 용어들을 이해하는 것이다.

속죄 │ 사랑 │ 희생제물 │ 대속
하나님의 진노를 풀어드림 │ 화목 │ 구속 │ 칭의 │ 중보

속죄

죄인들이 하나님과 연합하도록, 즉 하나님과 올바른 관계를 맺도록 하기 위해 예수께서 하신 일이 속죄(贖罪)이다. 죄 때문에 우리와 거룩한 하나님 사이가 단절되었지만, 예수께서 아버지의 뜻에 순종하여(요 6:38 ; 마 26:39 참조) 우리의 죄와 죽음과 정죄와 죄의 형벌을 대신 감당하셨다.

이렇게 하실 수 있었던 것은, 그분이 죄가 없으시므로 하나님과 인간 사이의 화목을 이루기에 합당한 희생제물이셨기 때문이다(고후 5:21 참조).

예수님의 보혈로 인하여 이제 우리의 죄는 덮어졌다. 즉, 속죄되었다. 그분의 피는 지금도 날마다 우리를 덮고 있고, 앞으로도 계속 그럴 것이다.

예수님은 지금 하늘에 있는 능력과 권세의 자리에 계시고, 그분의 피는 우리를 죄에서 깨끗하게 할 수 있다. 우리의 대제사장으로서 예수님은 자신의 피로 우리의 죄를 속(贖)하셨다.

구약시대에는 백성의 죄를 없애는 것을 상징하기 위해 속죄의 염소가 매년 이스라엘의 대제사장에 의해 광야로 보내졌다(레 16장 참조). 이처럼 예수님도 그분의 죽음으로 단번에 영원히 우리의 죄를 없애기 위해 이 땅에 보내지신 바 되었다.

예수님이 무덤에 묻히셨을 때 우리의 죄도 묻혔다. 그분이 죽은 자들로부터 다시 사신 것은 죄와 사망을 이기신 것이었다.

사랑

하나님께서 예수님을 통해 속죄를 이루신 것은 인간을 사랑하셨기 때문이다. 피조물을 향한 하나님의 사랑을 증거하는 성경구절은 많다. 몇 개만 인용해보자.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 요 3:16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 롬 5:8

사랑은 여기 있으니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요 오직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사 우리 죄를 위하여 화목제로 그 아들을 보내셨음이니라 요일 4:10

하나님께 사랑받을 만한 이유가 우리에게 있어서 그분이 우리를 사랑하시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거저 주시는 것이다. 오로지 그분이 우리를 사랑하기로 결정하셨기 때문에 우리를 사랑하시는 것이다.

하나님은 우리를 사랑하셨고, 그 사랑에 따라서 행동하셨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나타난 하나님의 행동은 그분의 사랑의 완벽한 표현이었다. 그런 행동만이 하나님의 사랑을 표현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었다.

하나님의 아들 예수님이 아닌 다른 존재가 우리를 대신해서 죽었다면 하나님의 거룩함과 의로움이 요구하는 절대적 기준을 충족시키지 못했을 것이다.

하나님은 예수님을 통하는 방법 외에는 다른 방법을 원하지도 않으셨고, 다른 방법으로 구원을 이루실 수도 없었다. 예수님 외에는 어떤 것도 구원의 충분한 방법이 되지 못했다.

희생제물

예수님의 죽음은 죄로 인하여 생긴 하나님의 진노를 풀어드리는 희생제물이었다. 예수님의 십자가 희생의 배경이 되는 것은 구약의 제사 제도, 그중에서도 특히 속죄제이다.

이사야의 예언에 따르면, 메시아는 백성의 죄를 짊어지고 자기 생명을 바쳐 죄를 위한 희생제물이 된다(사 53:4,5,10,12). 모세 율법이 정한 제사 제도는 메시아이신 예수님이 장차 그분의 희생을 통해 이루실 일을 예표하는 의미를 가진다.

대속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죽으신 것은 우리를 대신하여 죽으신 것이다. 그분은 우리를 위한 대속물(代贖物)이셨다. 하나님께서는 죄를 용납하지 않으시기 때문에 우리가 그분 앞에 나아가려면 먼저 우리의 죄가 제거되어야 한다.

우리는 우리 자신을 용서할 능력이 없고, 우리의 죄를 제거할 능력도 없다. 하지만 예수께서 우리가 하지 못하는 것을 이루셨다.

주님이 우리의 대속물이시다. 주님이 우리 대신 죽으셨다. 주님의 죽음은 우리의 죽음을 대신했다. 주님은 우리의 죄, 우리의 죽음, 그리고 우리가 받아야 할 영원한 형벌을 대신 짊어지셨다.

하나님의 진노를 풀어드림

‘진노를 풀어드림’(propitiation, 유화)은 하나님의 아들 예수님의 죽음이 죄와 죄인을 향한 성부 하나님의 심판을 충족시켰다는 뜻이다. 죄에 대한 절대적 형벌은 죽음이며 또 하나님과 영원히 분리되어 지옥에 있는 것이다.

흠 없는 희생제물이신 하나님의 아들은 죄가 없는 분으로서 십자가에서 죽으심으로 하나님의 율법의 요구를 충족시키셨다. 예수님의 속죄의 희생은 우리의 죗값을 치렀기 때문에 하나님의 진노를 풀어드렸다(롬 3:25 ; 히 2:17 ; 요일 2:2 ; 요일 4:10 참조).

화목

죄는 하나님과 죄인을 분리시킨다. 하나님은 거룩한 분이시기 때문에 심지어 죄를 쳐다보지도 않으신다. 죄가 하나님의 존전에 거할 수 없기 때문에 지옥이 존재할 수밖에 없다.

우리 모두는 죄인이기 때문에 하나님에게서 완전히 분리되어 있다. 회심하지 못한 상태에 있었을 때 우리는 허물과 죄로 죽어 있었다(엡 2:1 참조).

그러나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과 화목하게 되었다. 왜냐하면 그리스도의 정결케 하는 피가 우리와 하나님을 갈라놓았던 죄를 제거했기 때문이다. 바울은 그리스도의 화목의 사역을 이렇게 증거했다.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것이 되었도다 모든 것이 하나님께로 났나니
저가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를 자기와 화목하게 하시고 또 우리에게 화목하게 하는 직책을 주셨으니
이는 하나님께서 그리스도 안에 계시사 세상을 자기와 화목하게 하시며 저희의 죄를 저희에게 돌리지 아니하시고 화목하게 하는 말씀을 우리에게 부탁하셨느니라 고후 5:17-19

죄가 하나님과 우리 사이에 담을 만들어놓았지만, 예수께서 그것을 헐어버리셨다.

구속

죄는 죄인을 속박 상태에 빠지게 한다. 우리는 죄와 사망에 사로잡혀 있는 포로였다. 노예가 자신을 해방할 수 없듯이 우리도 우리 자신을 죄에서 해방시킬 수 없었다.

그러나 예수께서 우리를 구속(救贖)하셨다. 즉, 우리를 죄의 노예시장에서 사서 해방시키셨다. 예수님은 그분의 생명을 속전(贖錢)으로 치르셨다.

바울은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 그의 피로 말미암아 구속 곧 죄 사함을 받았다”(엡 1:7)라고 말한다. 우리의 대속물이신 예수께서 우리의 죄 때문에, 우리의 죄를 위해 십자가에서 피를 흘려 죽으심으로써 우리를 죄의 속박에서 구속하셨다.

하나님께서는 그리스도를 믿는 모든 사람을 위하여 그리스도가 치른 속전에 완전히 만족하셨다. 그리하여 완전한 구속이 이루어졌다.

칭의

‘의롭다’고 선언하는 것이 칭의(稱義)이다. 하나님께서는 그리스도를 통해 우리를 보시기 때문에, 하나님 눈에 우리는 죄를 한 번도 짓지 않은 사람들로 보인다.

예수님의 보혈은 우리의 모든 죄를 씻어버렸다. 우리의 과거의 죄, 현재의 죄, 그리고 미래의 죄까지 씻어버렸다. 이것은 거저 이루어졌다. 다시 말해서, 우리 편에서 어떤 행위나 공로가 없이 이루어졌다. 정죄를 받았던 우리, 몸은 살아서 걸어 다녔지만 영적(靈的)으로는 죽어 있었던 우리가 해방된 것이다!

한때 우리는 유죄판결에 따른 형벌의 집행을 기다리고 있었지만, 산 자와 죽은 자의 심판자께서 우리를 의롭다고 선언하셨다. 이것은 사형 집행이 시작되기 직전에 사형수가 사면을 받은 것에 비유될 수 있다.

하나님께서는 그분의 사랑하는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우리를 보시기 때문에 그분이 보시기에 우리는 완전하다. 이것은 그 깊이를 다 알 수 없는 무한한 은혜이다. 이것이야말로 완전히 순수한 사랑이다.

중보

예수님은 중보자이시다(딤전 2:5). 그분은 하나님과 인간 사이에 화목을 이루신 분이시다. 예수님은 하나님과 인간 사이를 갈라놓았던 죄를 자신의 죽음으로써 제거하시어 이 화목을 이루셨다. 우리는 죄가 있는 상태로는 성부 하나님 앞에 나아갈 수 없다.

우리는 먼저 중보자 예수께 가서 죄를 깨끗이 씻어야 한다. 성자 하나님은 우리와 성부 하나님 사이에 계신다. 아버지께 나아가려면 먼저 ‘그리스도 안에’ 있어야 한다.

예수님은 죽은 자들로부터 부활하셨다. 장사한 지 사흘 만에, 즉 주일(主日) 아침에 그분은 다시 사셨다. 이제 예수님은 영원히 사시면서 하나님의 보좌 앞에서 우리를 위해 간구하며 중보기도를 드리신다.

중보자이신 그분의 보혈은 언제나 능히 우리를 죄로부터 깨끗케 한다. 이것은 성경이 증거하는 것이다. 이제까지 역사 속에서 믿음을 고백했던 하나님의 교회도 늘 이것을 증거해왔다. 그리고 오늘날 회심한 사람들도 이것을 증거한다.

우리는 은혜로써 구원을 얻는다. 은혜라는 것은 우리의 노력 없이 하나님께서 거저 베푸신 과분한 호의이다.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구원하시는 분은 하나님이시다. 구원은 우리가 이룬 것이 아니다. 우리는 이 사실을 인정한다.

성령님은 우리가 죄인이며 또 우리에게 구주(救主)가 필요하다는 것을 깨닫게 하신다. 성령님은 예수님을 우리에게 계시하신다. 우리를 거듭나게 하시는 분은 성령님이시다. 우리가 우리 자신을 거듭나게 할 수 없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설교할 때나 복음을 증거할 때 예수님이 누구이신지, 그분이 무슨 일을 하셨는지를 분명히 밝힌다. 바울이 말했듯이, “믿음은 들음에서 나며 들음은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말미암는다”(롬 10:17). 예수님은 자신의 일을 완전히 이루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