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실로 회심했는가
PART1 당신 회심은 진짜인가?

3 회심을 일으키는 판에 박힌 테크닉은 없다

회심은 하나님께서 시작하신다

우리가 깊이 생각해보아야 할 가장 중요한 주제는 ‘회심’이다. 왜냐하면 우리는 모두 조만간 죽을 것이며, 그 다음에는 심판을 받을 것이기 때문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의 메시지가 어떤 식으로든 사람들에게 제시된 후에 회심이 일어난다. 복음은 설교, 텔레비전, 영화, 드라마, 음악, 소책자, 녹음테이프, 비디오테이프, 책, 성경 등등을 통해 제시된다. 어떤 식으로든 복음이 사람들에게 전달되는 것이다.

그들 중 어떤 사람들은 하나님나라를 찾는 중일 것이고, 어떤 사람들은 단지 호기심에 사로잡혀 있을 것이며, 어떤 사람들은 우연히 적절한 시간에 적절한 장소에 있게 되었을 것이다. 어떤 이들은 고통과 슬픔에 빠져 있을 것이고, 또 어떤 이들은 기쁨과 자기만족 속에 있을 것이다.

어떤 경우든 간에, 그들은 복음의 메시지에 접하여 그것에 주목하게 된다. 바울은 “믿음은 들음에서 나며 들음은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말미암았느니라”(롬 10:17)라고 말했다.

1963년 어느 날 내가 캘리포니아 주(州)에 있는 페어필드제일침례교회에서 담임목회자인 로버트 루이스가 전하는 예수님에 대한 설교를 들었을 때, 나는 복음에 대해 아무것도 몰랐다. 더 나쁜 것은, 내가 안다고 생각했던 것이 정확한 게 아니었다는 사실이다.

나는 기독교에 관한 것이라면 전부 이해할 수 없었다. 성경, 찬송가 가사, 특히 설교가 이해되지 않았다.

하지만 나는 결국 한 가지 진리를 깨달았다. 그것은 내가 하나님에게서 멀리 떨어져 있는 죄인이라는 것이었다. 이 사실을 깨달았을 때 나는 화가 났고 슬펐다. 나는 내가 지옥을 면할 수 없는 존재라는 것을 확신하게 되었다. 이런 확신은 성령님이 주신 것이었다. 왜냐하면 우리의 죄를 깨닫게 해주시는 분은 성령님이시기 때문이다.

그(성령)가 와서 죄에 대하여, 의(義)에 대하여, 심판에 대하여 세상을 책망하시리라. 요 16:8

내가 죄인이라는 깨달음은 나 자신에게서 나온 생각이 아니었다. 인간적으로 말하자면 당시 나는 젊은이로서 매우 확신에 차 있었고, 죄의식이나 불안이 없었기 때문이다.

회심하지 못한 사람들은 대개 자기의 죄 때문에 고민하지 않는다. 오히려 죄를 알아차리지 못하거나, 죄를 변명하거나, 죄를 달리 해석하거나, 죄를 옹호한다(때로는 이 모든 것을 다 한다). 사실 그럴 수밖에 없을 것이다. 자기의 죄를 쉽게 인정할 사람이 없지 않겠는가?

물론, 회심하지 못한 사람도 자기 자신이나 남들에게 가해진 자신의 파괴적 행위를 인식할 수는 있다. 하지만 성령님이 그에게 깨달음을 주시지 않으면, 그는 자신의 죄가 하나님의 법을 어긴 것이며 의롭고 거룩한 재판장 하나님께 죄를 범한 것이라고 생각하지 못한다.

성령님이 내게 알게 하신 두 번째 진리는 예수님이 구주(救主)시라는 것이었다. 나는 이 두 가지 깨달음, 즉 내가 지옥을 면할 수 없는 존재이고 예수님이 구주시라는 깨달음을 깜짝 놀랄 만한 특이한 일을 통해 얻은 것이 아니었다.

하늘에서 음성이 들리지도 않았고, 특이한 현상이 일어나지도 않았으며, 어떤 강력한 감정이 나를 압도하지도 않았다. 물론 때로는 감정이 생길 수도 있지만, 대개의 경우 성령님은 우리의 생각과 상상과 의지적(意志的) 갈등을 통해 우리의 죄를 깨닫게 하신다.

그분이 주시는 이런 깨달음은 어떤 외형적인 것보다 강력하다. 그것은 피할 수 없고 불가항력적인 것이기 때문에 우리의 주의를 사로잡는다. 난생 처음으로 나는 죄 때문에 절망감을 느꼈으며, 예수께 온통 관심이 집중되었다. 나는 어떻게 이런 일이 일어났는지 설명할 수 없다. 다만 이런 일이 일어났다는 것을 알 뿐이다.

나의 회심은 ‘회심의 고전적 유형(pattern)’에 따라 일어났으며, 나는 다른 많은 사람들도 이런 유형에 따라 회심하는 것을 보아왔다. 한 가지는 분명하다. 그것은 내가 내 힘으로는 예수님에 대해 하나도 깨달을 수 없었다는 것이다.

예수님은 “나를 보내신 아버지께서 이끌지 아니하면 아무라도 내게 올 수 없느니라”(요 6:44)라고 말씀하셨다(마 16:17 ; 요 16:14,15 ; 행 16:14 ; 갈 1:15,16 참조). 나는 하나님께 이끌렸지만, 어떻게 그런 일이 일어나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성령으로 난 사람

성령님은 우리가 지옥을 면할 수 없는 상태에 빠져 있다는 것과 예수님이 구주시라는 것을 우리에게 계시하신다. 이것을 증거해주는 성경구절들이 있다.

십자가의 도(道)가 멸망하는 자들에게는 미련한 것이요 구원을 얻는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능력이라 고전 1:18

육(肉)에 속한 사람은 하나님의 성령의 일을 받지 아니하나니 저희에게는 미련하게 보임이요 또 깨닫지도 못하나니 이런 일은 영적(靈的)으로라야 분변함이니라 고전 2:14

지옥에 갈 수밖에 없는 상태에 있는 인간은 복음의 진리를 알 수 없을 뿐만 아니라, 원수, 즉 마귀의 영향력 아래 있다.

그중에 이 세상 신(神)이 믿지 아니하는 자들의 마음을 혼미케 하여 그리스도의 영광의 복음의 광채가 비취지 못하게 함이니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형상이니라 고후 4:4

회심하지 못한 사람은 그를 방해하는 세력에게 억눌려 있기 때문에 절망적 상태에 빠져 있다. 이런 사람은 비록 종교철학이나 신학을 안다 할지라도 그리스도의 복음의 메시지를 깨닫지 못한다.

회심에 대한 중요한 교훈을 담고 있는 성경은 요한복음 3장이다. 예수께서는 존경받는 종교 지도자 니고데모에게 “사람이 거듭나지 아니하면 하나님나라를 볼 수 없느니라”(요 3:3)라고 말씀하셨다.

하지만 니고데모는 이 말씀을 이해할 수 없었다. 그는 성장한 사람이 어떻게 다시 태어날 수 있는가 하고 생각했다. 예수님은 그것을 설명하지 않으시고 이렇게 말씀하셨다.

바람이 임의로 불매 네가 그 소리를 들어도 어디서 오며 어디로 가는지 알지 못하나니 성령으로 난 사람은 다 이러하니라 요 3:8

이것은 ‘다시 태어나는 것’이 인간의 통제 능력을 벗어나는 일이라는 뜻이다. 니고데모는 그의 신앙을 꼼꼼하게 실천에 옮긴 사람이었기 때문에 그와 비슷한 지위에 있는 사람들에게 존경을 받았다. 그는 자기가 해야 할 일이라고 여긴 것은 모두 실천했다.

하지만 그는 자기의 의지(意志)에 의해 거듭날 수는 없었다. 자기를 영적으로 다시 태어나게 만들 수 없었다는 말이다. 거듭남을 주시는 분은 오직 하나님 아버지뿐이시다.

성령께서 우리에게 죄를 깨닫게 하시고 예수님을 죄와 죄의 형벌로부터 구원하는 분으로 우리에게 계시하시면, 우리는 죄로부터 깨끗케 되기 위하여 예수께 나아가야 한다.

우리는 오로지 예수께 나아가 믿어 죄 사함을 받아야 한다. 우리를 위해 십자가에서 피를 흘리신 부활의 주님께 나아가 우리 자신을 하나님의 자비에 맡겨야 한다.

성부 하나님은 우리를 매우 사랑하셨기 때문에 그분의 영원한 독생자(獨生子)를 이 땅에 보내셨다. 성자 하나님은 육신이 되어 우리 중에서 사셨다.

성부 하나님은 자신의 아들을 십자가에 죽게 하심으로써 구약의 예언들을 성취하시고 우리의 모든 죄를 그에게 전가시키셨다. 예수님은 거룩하고 깨끗하고 죄가 없는 분이셨기 때문에 완전한 희생제물이셨다.

어떻게 예수께 나아가는가?

나는 회심의 방법을 제시하고 싶지는 않다. 다만 내가 말하고 싶은 것은 예수께서 부활하여 살아 계신 주님이시기에 우리가 그분과 관계를 맺을 수 있다는 것이다. 우리는 예수께 나아가 우리의 죄를 고백하고 회개할 수 있다.

예수께 나아가 그분의 자비를 얻을 수 있다. 예수께 나아가 그분의 보혈로 죄 씻음을 받을 수 있다. 예수께 나아가 그분께 말씀드리고 우리를 구원해달라고 부탁드릴 수 있다. 예수께 나아가 기도할 수 있다.

기도라고 해서 특별한 기도를 말하는 것이 아니다. 글로 적거나 암송할 수 있을 정도로 조리 있게 만들어놓은 기도를 말하는 것이 아니다. 단지 우리 마음속에 있는 것을 예수께 말씀드리는 것이 기도이다.

예수님은 죄인들을 대신하여 죽으셨다. 우리의 죄가 아무리 극악무도하다 할지라도 예수님의 피는 우리의 모든 죄를 깨끗이 씻어줄 수 있다. 성경적 믿음, 즉 오직 예수님만을 믿는 믿음은 우리의 행위에서 나오지 않는다. 오직 예수님과 그분의 십자가 공로만을 믿고 의지하는 것이 참된 믿음이다.

성령님이 능력을 베풀어 돕지 않으시면 ‘구원 얻는 믿음’은 불가능하다. 성경에는 “영생을 주시기로 작정된 자는 다 믿더라”(행 13:48)라는 말씀이 나온다. 예수님을 믿는다는 것은 구원을 얻기 위해 그분께 나아가는 것이다.

예수님에 대한 개념, 관념, 바람, 염원, 교리, 또는 신학이 믿음이 아니다. 성경이 말하는 믿음은 오직 예수님만이 우리를 구원하실 수 있고 구원하실 것이며 우리에게 이 ‘구원 얻는 믿음’이 주어졌다고 믿는 것이다.

예수님은 “아버지께서 내게 주시는 자는 다 내게로 올 것이요 내게 오는 자는 내가 결코 내어쫓지 아니하리라”(요 6:37)라고 분명히 밝히셨다. 예수께 나아가는 사람은 성부 하나님께서 예수님에게 주신 사람이다.

첫째, 하나님께서 시작하시고, 둘째, 성령께서 도우시기 때문에 우리는 구원을 얻기 위해 예수께 나아간다. 자신의 자발적 의지로 먼저 하나님을 향해 나아가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예수께 나아가는 데 필요한 특별한 기계적 테크닉이나 정해진 방법이 있는 것은 아니다. 다만, 내가 앞 장(章)에서 언급한 바와 같이 회심의 신비를 상징하는 간격이 있을 뿐이다.

사람이 어떻게 예수께 나아가는지에 대해 아시는 분은 오직 하나님뿐이시다. 다만 우리가 아는 것은 예수께 나아갈 때 회심하여 죄 사함과 영생을 거저 얻는다는 사실이다.

여러 해에 걸쳐 내가 깨달은 사실이 하나 있다. 그것은 성경이 어떤 문제에 대해 침묵할 때에는 그럴 만한 이유가 있다는 것이다.

만일 우리가 회심이 일어나는 방법을 안다면 우리는 틀림없이 우리 힘으로 그 방법을 사용하여 효과를 보려고 시도할 것이다. 그리고 그 방법을 발전시키려고 노력하다가 결국에는 그것을 개악(改惡)할 것이다.

구원은 오직 하나님께서 이루시는 것이다. 하나님의 일이라는 말이다. 그렇다! 우리는 예수께 나아가 놀랍고 신비로운 방법에 의해 회심할 뿐이다. 성령님은 우리가 이해할 수 없는 방법을 통해 우리를 예수께 인도하신다.

회심을 낳는 성령의 능력

사람들은 다양한 모양으로 회심한다. 자신이 지옥을 면할 수 없는 존재임을 깨닫고 구원을 발견하려고 애쓰던 어떤 사람은 찰스 스탠리(Charles Stanley, 1932~. 미국 애틀랜타제일침례교회의 목회자)가 쓴 소책자에 나온 예수님의 대속(代贖)의 죽음에 대한 이야기를 읽고 회심했다.

또 어떤 사람은 여러 해 동안 단지 기독교화된 상태에서 비참하게 지냈는데, 부활하여 살아 계신 그리스도에 대한 설교를 듣는 중에 갑자기 회심했다. 또 내가 아는 어떤 사람은 찰스 웨슬리(Charles Wesley, 1707~1788. 감리교 창시자 존 웨슬리의 동생으로서 유명한 찬송시 작가)의 찬송가를 부르는 중에 회심했다.

미국에서 일어난 ‘제1차 대각성운동’(1735~1745년) 동안에 수만 명이 회심했는데, 그들은 집회 인도자의 호소에 따라 설교단 앞으로 나간 적도 없고 특별한 영접기도를 드린 적도 없었다.

사람들은 존 웨슬리, 조지 휫필드, 길버트 테넌트(Gilbert Tennent, 1703~1764. 미국 대각성운동의 지도자들 중 한 사람), 그리고 조나단 에드워즈 같은 사람들의 설교를 듣는 중에 회심했다. 그들은 자기들의 죄 때문에 괴로워하면서 크게 신음 소리를 냈다. 어떤 사람들은 하나님의 법을 범했다는 두려움 때문에 실신했다.

길버트 테넌트의 경우, 사람들이 그의 설교를 들은 후에 회심하는 것이 보통이었다. 예를 들면 사람들은 그의 설교를 듣고 집으로 돌아가는 중에 회심하거나, 그날 저녁에 침대에 누워 있다가 회심하거나, 그 다음 날 아침식사를 하는 중에 회심하거나, 또는 밭에 나가 쟁기질을 하다가 회심했다. 역사상 일어났던 부흥이나 각성 운동들 중에는 항상 이런 식으로 회심이 일어났으며, 오늘날도 이런 식으로 일어난다.

자기의 죄를 깨닫고 예수께서 죄의 문제를 해결해주시는 분이심을 알게 된 사람은 누구나 성령님의 능력에 의해 예수께 나아간다. “주 예수를 믿으라 그리하면 너와 네 집이 구원을 얻으리라”(행 16:31)라는 말씀은 복음의 분명한 선포이다.

이것은 “내가 어떻게 하여야 구원을 얻으리이까”(행 16:30)라는 빌립보의 간수의 질문에 바울과 실라가 던진 정답(正答)이다. 그들의 말을 듣고 간수가 무엇을 했는가? 사도행전의 기록자 누가는 이것에 대해 침묵한다. 다만 간수가 세례를 받았다고 말할 뿐이다. 그러나 세례를 받는 행위가 구원을 주는 것은 아니다. 세례는 회심 다음에 통과하는 절차이지, 세례가 회심을 낳는 것은 아니다.

빌립보의 간수는 ‘회심을 일으킨다는 판에 박힌 테크닉’을 이용하지 않았고, 영접기도를 드리지도 않았고, 설교단 앞으로 나가거나 간증을 하지도 않았으며, 어떤 특별한 행위를 하지도 않았다.

오직 그가 바울과 실라가 증거한 복음을 들었을 때 성령님이 그에게 그 자신의 절망적 상태를 깨닫게 해주시고 예수님을 구주로 계시하셨을 뿐이다. 이것은 예수께서 말씀하신 그대로 이루어진 것이다. 간수는 회심했지만, 성경 기자는 그 방법에 대해 침묵한다. 간수는 구원을 얻기 위해 주 예수를 믿으라는 말을 들었고, 그 말에 따라 믿었을 뿐이다.

많은 설교자들이 참된 회심을 전하는 설교를 하지 않고, 그 대신 구원을 찾는 사람들을 교회로 끌어들이기 위해 얄팍한 테크닉들을 사용한다. 예를 들면 교회성장 방법론, 반짝 효과를 보려는 15분 설교, 황홀한 기분을 주는 다양한 오락거리들에 의존한다.

현재는 참된 회심을 전하는 설교를 찾아보기 힘들다. 이런 현상을 초래한 이유들 중 하나는 지옥의 교리를 믿지 않는 많은 목회자들이 그들의 교인들이 지옥으로 가고 있을지도 모른다는 가능성을 믿지 않기 때문이다.

내가 믿기에는, 회심을 강조하는 많은 설교자들조차 회심을 일으키기 위해 영접기도 같은 비성경적 방법들을 사용하는데, 그 이유는 그런 방법들이 많은 복음주의적 교회들에서 전통으로 굳어졌기 때문이다.

솔로몬 스토다드(Solomon Stoddard, 1643~1728. 미국 식민지 시대의 매우 뛰어난 청교도 지도자)의 ‘중간쯤의 언약’(Halfway Covenant, 유아세례를 받았지만 입교문답을 하지 않은 아이들도 성찬에 참여하도록 해야 한다는 주장)의 시대에는 회심하지 못한 사람들에게 세례를 주고, 그들을 교인으로 받아들이고, 심지어는 목사 안수까지 주었다. 그런데 오늘날도 이것과 똑같은 일이 벌어지고 있다.

그러므로 오늘날 요구되는 것은 스토다드의 외손자로서 그의 뒤를 이어 매사추세츠 주(州) 노댐프턴에 있는 교회에서 목회했던 조나단 에드워즈처럼 담대히 참된 회심의 필요성을 외치는 설교자들이다.

만일 우리가 참된 회심을 외치지 않으면 우리의 교회들 안에 있는 회심하지 못한 사람들이 장차 예수께 “내가 너희를 도무지 알지 못하니 불법을 행하는 자들아 내게서 떠나가라”(마 7:23)라는 말씀을 듣게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