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과 캐나다 전역에 방송되는 ‘바이블 앤서 맨’(Bible Answer Man)이라는 프로그램의 진행을 맡고 있는 행크 해네그라프(Hank Hanegraaff)는 그가 대표로 있는 기독교연구원(Christian Research Institute)의 소식지에 이런 기도문을 실었다(1996년 겨울/봄, 제9권, 제1호).
하늘에 계신 아버지여! 아버지와 관계를 맺을 수 있는 방법을 허락하셨으니 아버지께 감사합니다. 저는 제가 죄인임을 잘 압니다. 하나님께서 저의 완전한 아버지이신 것을 감사합니다. 오, 예수님! 주님께 구하오니 저의 주(主)와 구주(救主)가 되소서. 제가 회개합니다. 그리고 저의 죄를 대신하는 주님의 완전함을 받아들입니다.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나는 이 기도에 담긴 신학에 진심으로 동의한다. 특히, 예수님과 그분의 완전한 구원의 방법에 대한 그의 견해에 동의한다. 하지만 그가 “당신이 이 기도를 드렸으면 당신이 영생을 얻었다는 것을 확신해도 좋다”라고 덧붙이는데, 과연 이 말이 옳은가?
1963년 나는 내가 출석한 침례교회의 어떤 한 집사와 함께 영접기도를 드렸지만, 그로부터 6개월 후에 회심했다. 내 아버지의 경우에는 ‘빌리 그레이엄 전도대회’에서 “예수님을 구주로 영접할 분은 앞으로 나오십시오”라는 말을 듣고도 앞으로 나가지 않았지만, 그날 밤 침대에 누워 있을 때 회심했다.
약 30년 동안 나는 구원을 찾는 많은 사람들과 함께 기도했다. 그럴 때면 거의 언제나 우리가 잘 아는 영접기도의 한 버전(version)을 사용했다. 그리고 나는 그들이 거듭났음을 보여주는 징후들을 찾았는데, 그들 중 일부는 회심했고 일부는 그렇지 못했다(적어도 내가 보기에는 그랬다. 이런 징후들에 대해서는 이 책 7장에서 논의하겠다).
하나님은 자신이 원하시는 방법대로 일하시기 때문에 영접기도를 통해서도 회심을 일으키실 수 있다. 오랜 세월 동안 내 신앙의 귀감(龜鑑)이었던 빌리 그레이엄은 영접기도를 대중화시켰다. 나는 그 분의 사역을 평가절하하고 싶은 생각이 조금도 없다.
하지만 단순히 영접기도를 드린다고 해서 구원을 얻는 것은 아니다. 사실, 진정으로 회심하지 못한 사람들이 이 기도를 드린 후 자기는 구원받았다고 착각할 수도 있다.
기도하는 것은 ‘행위’, 즉 의식적(意識的) 행위이다. 하지만 누구도 의지적(意志的) 행위에 의해 거듭나지는 못한다. 오랜 세월 목회하면서 내가 경험한 바에 의하면, 많은 사람들이 구원을 위해 많이 기도했지만 거듭나지 못했다.
회심은 신비이다. 짧고 간단한 기도를 드린다고 해서 회심에 이르는 것이 아니다. 복잡한 기도나 신학적으로 오류가 없는 기도를 드린다고 해서 회심에 이르는 것도 아니다.
회심, 즉 중생(重生)에는 역설이 존재한다. 다시 말해서, 서로 조화되는 것이 불가능할 것 같은 요소들이 공존한다. 예를 들면, 회심은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이지만 그러면서도 우리 편에서 “하나님께 대한 회개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 대한 믿음”(행 20:21)이 있어야 한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일하시고 또 우리가 회개하고 믿어야 한다.
이것은 역설, 즉 신비이다. 신비가 존재한다는 것을 인정하는 것은 타협하는 것도 아니고 오류를 용인하는 것도 아니다. 회심의 본질에 대한 성경의 증거를 믿고 따르기를 원하는 우리로서는 이런 신비를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문제는, 사람들이 구원을 받아들이기 위한 도구로 만들어놓은 것에 집착하다보니까 이런 신비가 자주 무시당했다는 것이다. 신비를 거부하여 얻게 된 것은 기독교화, 즉 거짓 회심이다.
영접기도를 사용할 때 여러 문제가 생길 수 있다. 내가 샌 틴교도소에서 자원봉사를 하면서 겪은 일은 그 문제들 중 하나를 보여주는 좋은 예가 된다. 그때 내가 주로 한 일은 이 감방에서 저 감방으로 옮겨 다니며 죄수들과 대화를 나누는 것이었는데, 그들 중 많은 사람들이 자기는 거듭난 그리스도인이라고 말했다.
감사하게도, 거의 모든 교도소와 청소년 범죄자 감호소에서 그리스도인들이 영혼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전도 사역을 하고 있다. 그리하여 많은 죄수들이 우리 주 예수님의 놀라운 복음을 듣고 구원을 위해 기도한다. 그들 중 어떤 사람들은 그런 기도를 여러 장소에서 여러 번 했으며, 자기들이 회심했다고 간증한다.
하지만 그들에게서 몇 년이 지나도 영적(靈的) 삶이 나타나지 않는다. 다시 말해서, 새 생명의 징후들이 나타나지 않는다. 거듭났다는 사람들에게서 기도하고 싶은 생각, 성경에 대한 관심, 예배와 찬양을 사모하는 마음, 예수님과 그분의 십자가에 대한 사랑이 나타나지 않는다면 그들에게 새 생명이 있다고 말할 수 없다.
“당신은 그리스도인입니까?”라는 질문에 어떤 사람은 “네, 나는 예수님을 영접하기 위해 기도했습니다”라고 대답할지 모른다. 그러나 영접기도를 했다고 다 된 것인가? 자신이 지옥을 면할 수 없는 죄인이며 자기의(自己義)가 아무짝에도 쓸모없다는 고백이 있어야 하는 것 아닌가?
예수님과 그분의 정결케 하는 보혈을 믿는 믿음은 왜 없는가? 그분이 살아 계신 주님이요 메시아라는 확고한 고백은 왜 없는가? 왜 구원과 죄 사함을 얻기 위해 예수께 나아가지 않는가?
목회자로서 나는 사람들의 회심의 간증을 듣는 경우가 있는데, 때로는 정말 실망하게 된다. 사람들은 자기들이 세례를 받고, 성찬식에 참여하고, 착하고 성실하게 살고, 남들에게 상처를 주지 않고, 교회에 등록하고, 설교단 앞으로 나가서 영접기도를 드렸기 때문에 회심했다고 간증한다. 불충분하고 비성경적이고 혼란스러운 회심의 간증밖에 없는 사람들의 이름이 ‘어린양의 생명책’에 기록되겠는가? 나는 의심스럽다.
최근에 나는 한 가지 상상에 빠진 적이 있다. 상상 속에서 우리 교회 교인들 중 한 사람이 하나님의 무서운 심판대 앞에 서 있었다. 예수께서 그에게 말씀하셨다. “내가 너를 도무지 알지 못하니 불법을 행하는 자야 내게서 떠나가라”(마 7:23 참조).
그러자 그 사람이 말했다.
“하지만 제가 출석하는 교회 목회자가 저의 위험성을 경고해주지 않았습니다. 그는 제 영적 상태가 어떤 것인지 지적해주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저는 구원의 확신을 가질 수 없었습니다. 이제는 다 늦었습니다.”
우리 교회 교인들 중에 회심하지 못한 사람이 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을 때 나는 두려움을 느꼈다.
어떤 사람이 진정으로 거듭났는지 아닌지 확실히 판단할 능력이 내게는 없다. 그런 것을 알 수 있는 영적 은사가 내게는 없다. 내게는 특별한 기름부음이나 지식이 없다. 그렇지만 종종 나는 어떤 사람 안에 예수님의 생명이 있는지 또는 없는지를 알 수 있다. 그리스도인에게는 그가 그리스도인이라는 징후들이 나타나기 때문이다. 심지어 영적으로 갓 태어난 아기에게서도 나타난다.
어떤 사람이 하나님을 사랑하고 구주를 사랑하고 성경에 흥미를 느끼고 예배와 기도와 찬양에 관심이 있다면, 그는 성경적 의미에서 회심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18세기의 위대한 설교자들 중 많은 사람들이 이런 경우를 가리켜 ‘소망이 있는 회심’이라고 불렀을 것이다.
하지만 자기가 거듭났다고 말하면서도 회심의 징후들을 보여주지 못하는 사람은 회심하지 못한 것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가장 위험한 것은 회심하지 못했는데 회심했다고 착각하는 것이다. 기독교화, 즉 거짓 회심은 지옥으로 가는 지름길이다.
여러 해 동안 그리스도에 대한 신앙을 고백하고 교회에서 (때로는 중직자의 위치에서) 열심히 봉사하다가 신앙을 버리고 교회를 거부하고 타종교로 개종(改宗)하는 사람들이 있다.
목회하면서 나는 그렇게 이슬람교나 불교로 개종하는 사람들을 종종 보았다. 이런 일이 생각보다 많다. 그렇다면 그런 사람들은 회심했던 것인가? 그들은 어느 정도 세월이 흐른 후에 다시 그리스도께로 돌아올 것인가?
이런 사람들을 관찰하고 그들에게 교회에 다녔던 이유와 동기를 물어본 다음, 나는 그들에게 처음부터 진정한 회심이 없었다고 결론을 내렸다. 모든 경우가 다 그랬다. 그들에게 참된 회심은 없었고 기독교화가 있었을 뿐이다.
그들은 어렸을 때 배운 것에 따르거나, 부모의 믿음을 자기 것으로 동일시하거나, 그리스도인 친구들이나 지도자들에게 인정받기 위해 교회생활에 순응했을 뿐이다(내 결론이 너무 내 입장에서 내린 결론으로 보이거나 증명할 수 없는 이야기로 들릴 수도 있다. 만일 그렇다면 상황이 허락하는 대로 실험을 해보라).
내가 말하는 것이 비단 현재에만 일어나는 현상은 아니다. 초대교회부터 지금까지 늘 이런 일이 일어났다. 사도 요한은 그 당시의 교회 안에도 그리스도인이 아닌 사람들이 있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그는 이렇게 말했다[이것은 영지주의(靈知主義)로 넘어간 사람들을 가리켜 말한 것으로 보인다].
저희가 우리에게서 나갔으나 우리에게 속하지 아니하였나니 만일 우리에게 속하였더면 우리와 함께 거하였으려니와 저희가 나간 것은 다 우리에게 속하지 아니함을 나타내려 함이니라 요일 2:19
목회자 대부분은 이 성경구절이 무슨 뜻인지 잘 알 것이다. 선한 사람들, 영적인 일에 관심을 보인 사람들, 교회 일에 열심히 봉사한 사람들, 사랑이 많은 사람들 등이 스스로 그리스도인이라고 말했지만 결국에는 그렇지 않은 것으로 판명되는 경우를 많이 보기 때문이다.
이런 사람 중 일부는 십자가를 분명히 전하는 설교가 계속 반복되면 교회를 떠날 것이다(아니면, 회심할 것이다). 만일 목회자가 복음을 충실히 전하지 않는다면 이런 사람들은 자기가 하나님나라 안에 있다는 착각 속에서 계속 살아갈 것이다.
회심은 하나님께서 그리스도 안에서 행하시는 주권적인 일이다. 사람들이 그들의 죄에서 돌이켜 예수님을 믿도록 하기 위해 성령님은 그들에게 회개와 믿음의 선물을 주신다. 인간의 관점에서 볼 때, 사람이 회심하는 방법은 신비이다.
그러나 이것이 신비라고 해서 인간이 아무것도 하지 않고 가만히 있으면 안 된다. 분명히 하나님은 성경을 통해 모든 사람들에게 “주 예수를 믿으라”(행 16:31)라고 간절히 권하시고, 또 명령하신다.
하나님은 성경에서 ‘사람이 어떻게 믿어야 하는가’ 하는 문제에 대해 구체적 답변을 제공하지 않으신다. 심지어 빌립보 감옥의 간수가 바울과 실라에게 “내가 어떻게 하여야 구원을 얻으리이까”(행 16:30)라고 물었을 때에도 “주 예수를 믿으라 그리하면 너와 네 집이 구원을 얻으리라”(행 16:31)라는 대답이 주어졌을 뿐이다.
바울과 실라는 간수에게 무엇을 해야 한다거나 어떻게 말해야 한다고 가르치지 않았다. 이 사건에 대한 기록의 뒷부분으로 가면, 간수가 결국 믿음을 갖게 되었다는 것이 드러난다. 하지만 그가 믿음에 이르기 위해 어떤 과정을 거쳤는지에 대해서는 성경 기자가 침묵한다. 요한복음 서두에는 우리가 잘 아는 유명한 구절이 나온다.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 이는 혈통으로나 육정으로나 사람의 뜻으로 나지 아니하고 오직 하나님께로서 난 자들이니라. 요 1:12,13
우리는 어떻게 예수님을 믿는가? 우리는 어떻게 그분을 영접하는가? 우리는 요한이 이 문제에 대답해주기를 원하지만, 그는 말하지 않는다.
이토록 중요한 문제에 대해 성경 기자가 침묵함에도 불구하고 많은 사람들이 이런저런 대답을 내놓았다. 물론 이것은 불행한 일이고 위험스러운 일이다. 그들이 내놓은 대답들 중 어떤 것도 성경의 지지를 얻지 못한다.
왜냐하면 사람이 ‘어떻게’ 거듭나는지 하나님은 성경에서 분명하게 말씀해주시지 않기 때문이다. 다만 거듭남이 우리의 의지(意志)나 행위로 말미암는 것이 아니라고 말씀하실 뿐이다(에베소서 2장 8,9절에서 바울은 심지어 믿음도 하나님의 선물이라고 분명히 밝힌다).
많은 독자들이 로마의 ‘시스티나 성당’(바티칸 궁전에 있는 교황의 예배당)의 천장에 있는 미켈란젤로의 그림 〈천지창조〉를 사진으로 보았을 것이다. 이것은 전능하신 창조주 하나님께서 그분의 사랑하는 타락한 피조물에게 손을 내밀고 계신 것을 그린 것이다.
아담도 하나님을 향해 손을 내밀지만 그분의 손가락을 만지지는 못한다. 그 그림에서 하나님의 손과 아담의 손 사이의 간격은 몇 센티미터에 불과할 것이다. 나는 이 간격이 회심의 신비를 상징한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우리는 이 간격을 없애서 그 그림을 인간이 하나님의 손을 붙잡는 것으로 바꾸기를 원한다. 즉, 우리는 회심의 신비를 풀기 원한다. 이것은 언제나 우리를 괴롭히는 유혹이다. 우리는 ‘자력(自力)으로 처리하는 것을 가능하게 해주는’ 구체적 방법을 발견하여 구원에 이르기를 원한다.
그리하여 구원을 하나님 손에서 빼앗아 우리 손으로 움켜쥐려고 시도했다. 회심이 우리에게 가시적(可視的)이고 분명한 것이 되도록 만들어주는 방법들을 고안해내려고 애썼다. 하지만 이런 시도는 사람들을 회심시키지 못하고 단지 기독교화하고 말았다. 명심하라. 회심은 신비이다. 앞으로도 언제나 그럴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