존(John)이라는 사람은 자기가 여전히 예수님을 믿는다고 말했다. 그의 말에 의하면, 자기는 열두 살 때 교회 수련회에서 그리스도인이 되었다는 것이다. 그는 세례를 받았고, 1주일에 적어도 두 번은 교회에 출석했다. 대학 다닐 때 신앙생활이 나태에 빠졌지만, 결혼한 후 다시 아내와 함께 규칙적으로 교회에 다녔다.
그는 영적으로 안정된 것처럼 보였다. 심지어 목회자의 길을 걸을까 하는 생각까지 한 적이 있었다. 그에게는 거의 의심이 없었고, 그는 깨끗한 삶을 살았다. 그의 행동을 보면 그는 모범적인 그리스도인처럼 보였다. 하지만 언젠가부터 그는 기독교의 모든 것에 싫증을 느끼고, 그리스도인이기를 중단했다. 그렇다고 해서 다른 종교를 가진 것은 아니었다. 단지 교회에 나오지 않을 뿐이었다.
그 후 그는 어느 추도예배에서 나를 만났다. 그리고 내게 “나는 내 아내와 가족이 나를 위해 기도한다는 것을 잘 압니다. 하지만 교회를 떠난 지금 나는 전보다 더 좋습니다”라고 말했다. 전에 교회를 다닐 때 그는 단지 기독교 교리와 행동의 표준에 따랐을 뿐이다. 자기가 하나님 앞에서 죄인임을 깨닫지 못했기 때문에 예수님을 구주(救主)로 믿을 필요성을 느끼지 못했다. 그는 예수님을 위대한 영적 선생으로 존경했을 뿐이었다. 그는 회심(回心)하지 못했던 것이다.
산호세 출신의 호세(Jose)는 샌 틴 교도소(캘리포니아 주 샌프란시스코 북쪽 교외에 있다) 감방의 창살 뒤에서 나를 뚫어지게 쳐다보았다. 그는 내가 건네주려고 하는 성경책을 받고 싶어 하지 않았다. 그는 샌프란시스코 카운티 교도소에 있을 때 이미 성경책을 한 권 받은 적이 있었다. 그는 가톨릭교회에서 성장했다. 하지만 그의 주장에 따르면, 그는 10대 때에 로스앤젤레스의 한 대형 교회에서 성령세례를 받았다.
캘리포니아 주(州)는 세 번 중죄로 기소되어 세 번 유죄판결을 받은 사람을 무조건 25년 형(刑)에 처하는 소위 ‘삼진(三振) 아웃제’를 시행했는데, 호세는 바로 이 형을 받고 복역하고 있었다. 감옥에서 그는 기독교 신앙을 가진 자기가 어찌하여 그 꼴이 되었는지 의아해했다. 나는 한 시간 정도 그와 대화를 나눈 후 그의 문제가 무엇인지 알게 되었다.
그는 예수님이 왜 십자가에서 돌아가셨는지 몰랐고, 자기가 죄 사함 받았다는 느낌이 없었다. 더욱이 그는 기도하지 않았고, 성경을 읽지 않았고, 교도소에서 드리는 예배 모임에 참석하기를 거부했으며, 그리스도인이라고 주장하는 수형자(受刑者)들을 경멸했다. 그러면서도 자신은 성령세례를 받았다고 주장했다. 그는 기독교화된(Christianized) 것뿐이었다. 그는 속고 있었던 것이다.
호세의 바로 옆방에는 오클랜드(Oakland) 출신의 마이크(Mike)라는 사람이 있었다. 호세보다 열두 살 어린 마이크는 구치소에 12년 동안 있다가 최근에 샌 틴 교도소로 옮겨졌다. 5세 때 침례를 받은 그는 침례교회에서 성장했다. 6세 때부터 주일학교 성가대에서 노래했고, 9세 때에는 말씀을 전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17세 때에는 캘리포니아 주 청소년 교정국의 관리 아래에 있었고, 25세 때에 ‘네이션 오브 이슬람’(the Nation of Islam, 1930년 미국 미시건 주에서 창설된 흑인 이슬람 운동 단체)으로 개종했다.
내가 그에게 “그런데 당신은 정말로 그리스도인이었습니까?”라고 물었을 때, 그는 “목사님, 그런 식으로 말씀하지 마십시오. 내가 교회에서 한 모든 일을 방금 말씀드렸지 않습니까?”라고 대답했다. 그러나 그는 회심의 체험이 없는 사람이었다. 다시 말해서, 그는 죄를 용서받기 위해 자기에게 구주가 필요하다고 느끼지 못했다.
그런데도 그는 자꾸 자기에게 신앙이 늘 있었다고 내세웠다. 확신하건대 그는 많이 기독교화된 사람이었지만, 그것이 사라졌을 때 다른 것이 그 자리를 차지하고 말았다. 내가 쉐리(Sherie)를 만난 것은 내가 주관하는 ‘이혼 치유 집회’에서였다. 그녀는 두 번째 결혼이 파경을 맞았을 때 한 친구의 권유를 받고 내 집회에 참석했다. 그 집회의 일정 동안 나는 그녀와 몇 시간 대화를 나누었다. 그때 들은 이야기는 이렇다.
그녀가 첫 번째 결혼에서 실패했을 때 몇몇 친구들이 망가진 그녀의 삶을 다시 일으켜 세우도록 돕기 위해 그녀를 찾아왔다. 그들은 그녀를 자기들의 교회로 데려갔다. 그녀의 말에 따르면, 그녀는 구원받은 순간부터 헌신적인 그리스도인이었다. 심지어는 은사 운동을 하는 교회에서 예배를 인도하기도 했고, 교도소를 찾아가 사역하기도 했다. 그러다가 몇 년 후 불신자와 만나 사랑에 빠져 결혼한 후 갑자기 교회를 떠나고 기독교를 버렸다.
그녀의 그리스도인 친구들은 충격과 실망에 빠졌지만, 그녀는 자기에게 일어났던 일을 분명히 알고 있었다. 처음에 그녀는 단지 자기를 도와준 사람들의 생활방식과 철학을 받아들였던 것뿐이었다. 그리고 자기가 옳은 일을 하고 옳은 것을 말하고 열심히 신앙생활을 하기 때문에 그리스도인이라고 생각했던 것이다. 하지만 점차적으로 흥미를 잃어가다가 재혼이라는 기회를 핑계로 교회를 떠났던 것이다.
나는 밥(Bob)의 결혼식에서 주례를 보았는데, 그는 미국의 전형적인 중산층 교인이었다. 그가 내게 들려준 말을 요약하면 이런 얘기가 된다.
“나는 그리스도 중심적 교회에서 세례를 받은 교인입니다. 나는 예수님을 영접하기 위해 여러 번 기도했으며, 여러 번 새롭게 내 삶을 헌신했습니다. 나는 제자훈련반을 마쳤고, 그리스도의 주권에 복종했으며, 나의 삶은 건전합니다. 하지만 왜 내가 그리스도인처럼 느끼지 못합니까? 왜 내가 그리스도인처럼 믿지 못합니까? 왜 내가 그리스도인의 행복한 삶을 살지 못합니까?”
글래디스(Gladys)는 1975년에 예수님을 따르기로 결심했다. 그녀는 예수께서 죽은 자들로부터 부활하셨고 장차 그녀를 천국으로 데려가기 위해 다시 오실 것이라고 확신하게 되었다.
그러나 대학의 교양학부를 다닐 때 그녀는 하나님이 필요 없고 사람들이 인생을 설명하고 사회질서를 유지하기 위해 종교를 만들어냈다고 주장하는 진화론을 받아들이게 되었다. 그리고 이성교제가 실패로 돌아간 후에는 동양(東洋) 종교들을 연구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그녀는 곧 싫증을 느껴 다시 성경과 기독교 서적을 읽기 시작했다. 그녀는 하나님이 살아 계시다는 증거를 찾으려고 애썼다. 기독교를 변증하는 자료들을 연구한 후 그녀는 기독교가 진리라고 확신하게 되었다. 기독교 세계관이 믿을 만한 것이라고 깨닫게 된 것이다. 그리고 많은 지성인들이 그리스도인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고, 기독교가 만들어낸 문화가 세계에서 가장 가치 있는 문화라고 여기게 되었다.
기독교 미술, 기독교 역사, 기독교 음악, 기독교 건축, 그리고 기독교 예배와 의식(儀式)이 그녀에게는 매우 매력적으로 보였다. 거의 같은 시기에 그녀는 소속감을 느끼게 해주는 교회를 알게 되었다. 그녀는 좀 더 깊은 차원에서 그녀의 새 친구들과 일체감을 느끼기를 원했고, 결국 예수님을 믿기로 결심했다고 공개적으로 밝혔다.
그러나 그 후, 즉 1980년에 그녀는 기독교를 흉내 낸 미국의 양대(兩大) 사이비 종교를 번갈아 출석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어떤 것이 진짜 종교인지 갈피를 잡을 수 없었다. 결국 1990년 그녀는 종교 서적을 모두 꾸려서 자선단체에 갖다주었으며, 자신은 그리스도인이 아니라고 결론 내렸다.
나는 30년 동안 목회를 해오면서 존, 호세, 마이크, 쉐리, 밥, 그리고 글래디스 같은 사람들과 이야기를 나누어보았다. 이런 사람들은 대개 교회에서 성장하면서 세례를 받았거나, 교회 수련회에 참석했거나, 신앙을 공개적으로 고백했거나, 제자훈련반을 수강했다. 그러나 그들 중 어떤 사람들은 그리스도인이기를 포기했고, 또 어떤 사람들은 자기들이 그리스도인이라는 확신이 없었다. 그 이유는 무엇보다도 그들이 회심한 사람들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많은 사람들이 자기가 거듭난 그리스도인이라고 생각하지만, 사실 그들은 단지 기독교화된 것뿐이다. 기독교적 원리들을 받아들이거나 교회의 일상적 활동들에 참여하는 것이 회심을 체험하는 것은 아니다. 회심하지 못하고 단지 기독교화된 사람들은 결국 그들의 영적 갈증을 해소하기 위해 기독교가 아닌 다른 것을 찾는 경향을 보이기도 한다. 하지만 대부분의 경우, 사람들은 기독교화가 회심이라고 착각한다.
내가 이런 말을 하니까 혹자는 이렇게 말할지도 모르겠다.
“당신은 회심을 너무 어렵게 생각하는군요. 당신은 자기가 그리스도인이라고 말하는 사람에게 너무 많은 것을 요구합니다. 다른 종교나 철학을 신봉하지 않고 하나님과 예수님과 성경을 믿으면서 때때로 교회에 출석하고 착하게 살면 충분한 것 아닙니까?”
이렇게 말하는 사람에게 동조할 사람들이 교회 안팎에 많이 있다는 것을 나는 잘 안다. 그러나 성경이 말하는 그리스도인이 어떤 사람인지 잘 보면, 그런 사람들이 내세우는 것으로는 충분하지 않다는 것이 쉽게 드러난다.
참된 기독교는 죄가 우리와 하나님 사이를 갈라놓았고 예수 그리스도께서 주(主, Lord)와 구주(救主, Savior)시라는 확신에서 시작된다. 일단 하나님께서 우리 눈을 뜨게 하시어 이런 확신을 갖게 해주시면, 우리는 우리가 통제할 수 없는 방법으로 거듭나게 된다. 이렇게 중생(重生)한 사람은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까지 성장하는 평생의 과정에 첫걸음을 내디딘 것이다.
비록 그가 완전하지는 않지만, 그의 중생을 입증하는 나름대로의 증거가 처음부터 있게 된다. 성경에 나오는 회심한 사람들, 즉 마태, 삭개오, 바울 같은 사람들에게서는 이런 증거가 나타났다. 사산(死産) 다음에는 아무것도 없지만, 새로운 출생 다음에는 생명의 삶이 있게 마련이다.
내 얘기를 좀 해보자. 젊을 때 나 역시 복음의 진정한 메시지를 이해하지 못한 채 단지 기독교화된 상태에서 살았던 적이 있다. 이것을 보여주는 좋은 예가 내가 공군에 지원할 때 있었던 일이다. 당시 내가 작성해야 할 입대 원서에는 종교를 표시하는 칸이 있었다. 나는 내가 기독교인이라고, 나의 교파는 성공회(聖公會)라고 표시했다.
내가 이해하는 한, 나는 그리스도인이었다. 내가 볼 때 나는 유대교 신자나 힌두교 신자나 불교 신자나 이슬람교 신자가 아니었기 때문에 그리스도인이었던 것이다. 하지만 그때까지 나는 성공회 교회에 가본 적도 없고, 성공회 신자가 어떤 특성을 가지는지 전혀 알지 못했다. 다만, 그전에 밴스 패커드(Vance Packard)의 《출세주의자들》(The Status Seekers)을 읽고 성공회가 미국에서 가장 알아주는 교파라는 생각을 가졌을 뿐이다. 당시 출세주의자였던 나는 성공회 신자라고 표시함으로써 졸지에 성공회 그리스도인이 되었던 것이다!
나 같은 사람이 나 혼자만은 아니다. 미국에서 태어나는 사람들은 소위 ‘기독교 문화’ 속에서 살아가게 된다. 내가 성장기를 보낼 때 사람들은 교회와 하나님과 성경에 대해 무엇인가를 배우며 자랐다. 적어도 당시 분위기에 의해 간접적으로라도 배웠다. 당시 많은 사람들이 세례를 받았고, 교회의 교인이 되었으며, 주일학교에도 다녔다. 특히 어린 시절에 그랬다. 그러므로 우리가 그리스도인이라는 것이 어떤 의미에서는 맞는 말이었다.
그러나 현재는 상황이 바뀌어서 과거 같지 않다. 많은 젊은이들이 교회와 기독교에 대해 전혀(또는, 거의) 모른다. 오히려 그들은 자기가 그리스도인이 아니라고 생각하는 경향이 더 강하다. 그러나 내가 젊을 때에는 그렇지 않았다.
회심에 대한 그리스도인들의 일반적인 통념(通念)은, 예배 중에 설교단 앞으로 나오고 영접기도를 드리고 세례를 받고 교인으로 등록하고 사도신경을 암송하고 예수를 믿거나 그리스도인처럼 행동하겠다고 결심하면 회심이 일어난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런 것들은 회심을 일으키기보다는 기독교화의 표시일 뿐이다. 성경은 이런 것들을 회심의 증거로 보는 견해를 지지하지 않는다.
물론, 예외적인 경우들이 있을 수는 있다. 하나님은 그분이 원하시는 방법을 통해 얼마든지 일하실 수 있기 때문에 어떤 방법을 통해서라도 사람들을 회심시키실 수 있다. 그러나 우리는 말씀을 전하고 전도할 때 전통이나 소위 ‘그럴듯한 방법’에 의존하지 말고 건전한 성경적 방법을 사용해야 한다.
윌리엄 하슬람(William Haslam) 목사의 이야기는 기독교화의 명확한 예가 된다. 그는 19세기 중반에 잉글랜드의 콘월(Cornwall)에 살았던 성공회 목회자였다. 그는 교회에 다니는 부모에게서 태어나 유아세례를 받고, 입교문답을 하고, 목사 안수를 받았다. 그는 회심하지 못한 상태에서 교회의 요구 사항들을 모두 충족시켰다.
이 사건은 오래전에 일어난 것이지만, 이것과 똑같은 일이 오늘날도 반복된다[하슬람 목사의 경우 다행히 그의 교회 교인들이 그가 회심하지 못한 것을 알고 그를 위해 기도하기 시작했고, 결국 그는 교회에서 설교하는 중에 회심했다. 그의 회심과 그 이후에 일어난 놀라운 사건들은 《사망에서 생명으로》라는 책에 기록되어 있다].
어찌하여 그토록 많은 사람들이 회심하지 못하고 단지 기독교화된 상태에 머무르고 마는가? 어찌하여 그토록 많은 사람들에게 본질은 없고 형식(모양)만 있는가? 그 이유는 참된 성경적 회심이 우리가 완전히 이해할 수 없는 신비이기 때문이다. 성경적 회심은 오직 하나님만이 이루시며, 구원은 오직 하나님께 속한다.
그러나 그 사실에 만족할 수 없는 우리는 사람들이 구원을 받아들이게 할 수 있는 방법을 만들어냈다. 그리고 이 방법의 조건을 충족시키는 사람이 생기면 그를 그리스도인이라고 선포했다. 어떤 집단에게 받아들여지고 인정받으려는 것이 사람들의 본능이다. 그들은 구원과 죄 사함이 정말로 중요한 문제라고 느끼지 못한다.
단지 집단에 소속되기를 갈망하는 욕구 때문에 그들은 별생각 없이 이런저런 것들을 행한다. 이런 과정을 통해 그들은 기독교화된다. 즉, 거짓 회심을 하는 것이다.
교회들은 사람들에게 예수께 나아가 죄 사함을 받고 구원을 얻으라고 가르치지 않고 그 대신 교회가 만들어놓은 훈련 프로그램이나 의식(儀式)에 의지하라고 가르쳤다. 그러므로 이제 설교자들은 회심을 강조하는 설교를 해서 기독교화(christianization)의 허상을 폭로해야 한다.
그런데 한 가지 밝혀두어야 할 것은, 회심하지 못한 자들은 이런 설교를 싫어한다는 것이다. 이런 설교가 그들의 유일한 희망이지만, 종종 그들은 이런 설교에 저항한다. 그들은 이런 설교에 분노하며, 때로는 강하게 반발한다. 그래도 목사가 계속 회심을 강조하면 그들은 소위 ‘긍정적 메시지’를 전하는 목사가 사역하는 ‘우호적인’ 교회로 가버리거나, (더 나쁜 것은) 교회 안에서 정치적 술수를 이용하여 목사의 입을 막아버린다.
그러므로 회심하지 못하고 단지 기독교화된 사람들은 교회 안에서 위험스러운 존재가 될 수 있다. 그들은 교회를 분열시키고, 지독한 불화를 조장하며, 때로는 회심을 강조하는 목회자의 사역을 끝장내버릴 수 있다.
소위 ‘의인(義人)들’을 깨우는 것은 즐거운 일이 못 된다. 예수께 반응을 보이는 사람들은 의인들이 아니라 죄인들이다. 예수님은 이미 이 사실을 꿰뚫어보셨다. 스스로 의롭다고 하는 바리새인들의 공격을 받았을 때 주님은 “내가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요 죄인을 불러 회개시키러 왔노라”(눅 5:32)라고 말씀하셨다.
기독교화는 강력한 망상이다. 이것에 사로잡힌 사람들은 자기가 천국을 향해 순항(順航)하고 있다고 착각한다. 이 ‘잃어버린’ 의인들은, 청교도 설교자 조나단 디킨슨(Jonathan Dickinson, 1688~1747. 1730년대와 1740년대의 대각성운동의 지도자들 중 한 사람)의 말을 빌려 표현하자면 “지옥 바로 옆에서 잠을 자고 있다.” 복음전도자는 그들을 깨워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장차 예수께서 그들에게 “내가 너희를 도무지 알지 못하니 불법을 행하는 자들아 내게서 떠나가라”(마 7:23)라고 말씀하실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