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대사회의 끊임없는 경쟁의 정글에서는 조금만 쳐지면 낙오하여 영원히 마이너리그의 변방에서 떠도는 자로 남고 만다. 그래서 앞만 보고 질주한다. 지금 우리나라는 (심지어 그리스도인들마저도) 유치원에서 대학까진 동족상잔同族相殘의 영어전쟁英語戰爭에, 대학 졸업 후엔 피 말리는 ‘머니게임’Money Game에 함몰되어 있다. 기독교 신앙이라는 것도 이 전쟁과 이 게임에서 응원가를 잘 불러주기를 강요받고 있다.
이렇게 우리 사회는 획일화, 목표의 단순화를 향해 매진하고 있다. 이 획일화된 사회는 복잡한 사고思考를 요청하지 않는다. 목표를 향한 전진만이 있을 뿐이다. 편집증적인 몰두가 아니면 낙오이다. 그러니 거룩한 것을 깊이 생각할 여유가 없다.
그래서 아예 거룩한 생각을 안 하든지, 인스턴트 QT들을 섭취함으로써 ‘거룩한 생각’의 의무를 다했다고 자위하든지 하기가 쉽다.
그러나 히브리서 기자는 오늘 우리에게 타협 없이 이렇게 요구한다.
“예수를 깊이 생각하라!”(히 3:1)
오늘 우리는 우리의 현실 목표와 이해득실은 깊이 생각하지만, 예수는 깊이 생각하는가? 그러나 기독교 역사상 참으로 예수를 깊이 생각한 인물이 있었으니, 그가 바로 《그리스도를 본받아》라는 저서로 유명한 토마스 아 켐피스이다.
그는 평생의 삶을 통해 그리스도를 깊이 묵상한 사람이다. 이 책(《주인님, 나를 바칩니다》)은 복음서 전체에 나타난 그리스도의 삶에 대해, 특히 그리스도의 수난에 대해 깊이 묵상한 책이다.
한국에서는 《그리스도를 본받아》만 많이 알려졌지만, 그에 못지않게 그가 심혈을 기울여 저술한, 복음서를 놓고 그리스도의 생애를 묵상한 ‘그리스도의 삶 묵상’ 시리즈는 한국 기독교에 전혀 소개되지 않았다.
토마스 아 켐피스는 자신의 제자들에게 경건의 훈련을 시킬 때 두 가지 텍스트를 사용하였으니, 하나는 《그리스도를 본받아》이고 다른 하나는 ‘그리스도의 삶 묵상’이었다.
규장에서 ‘그리스도의 삶 묵상’ 시리즈 가운데 그리스도의 수난에 대한 묵상만을 묶어 《주인님, 나를 바칩니다》로 펴내어 한국 기독교에 처음으로 소개한다.
그런데 왜 우리가 그리스도의 수난을 깊이 생각(묵상)해야 하는가? 그리스도의 수난 사건은 나의 속죄贖罪를 완성하신 사건이다. 우리는 그리스도의 수난을 묵상함으로써 바른 속죄론 위에 설 수 있다.
우리에게는 ‘바른 교리’orthodoxy가 필요하다. 그러나 ‘바른 교리’에만 그치고 말면 ‘죽은 정통’이 되기 쉽다. ‘바른 교리’는 반드시 ‘바른 실천’ortho-praxis, 곧 ‘바른 삶’으로 우리를 인도해야 한다.
그러므로 오늘 한국 교회의 속죄론은 바른 교리에만 머물면 안 될 것이다. 속죄론은 반드시 자기를 부인否認하는 제자도弟子道의 삶을 제시해야 한다. 정통의 십자가 교리는 십자가를 지는 정통의 삶의 길로 우리를 인도해야 한다.
“무리와 제자들을 불러 이르시되 아무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을 것이니라”(막 8:34).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산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이라”(갈 2:20).
“그리스도 예수의 사람들은 육체와 함께 그 정과 욕심을 십자가에 못 박았느니라”(갈 5:24).
토마스 아 켐피스의 이 책은, 그리스도의 수난을 묵상함으로써 주님의 은혜에 감격하여 매일 자기 십자가를 지는, 강력한 자기부인自己否認의 삶으로 우리를 인도한다. 그렇지만 이 삶이야말로 죽은 자 같으나 ‘사는 자’의 삶이고, 지는 것 같지만 ‘이기는’ 것임을 이 책은 강력히 확증한다.
“무명한 자 같으나 유명한 자요 죽은 자 같으나 보라 우리가 살고 징계를 받는 자 같으나 죽임을 당하지 아니하고 근심하는 자 같으나 항상 기뻐하고 가난한 자 같으나 많은 사람을 부요하게 하고 아무것도 없는 자 같으나 모든 것을 가진 자로다”(고후 6:9,10).
이 책에서 예수님의 호칭인 ‘주’主, Lord를 “주인님”과 “주님”으로 병용했다. 특히 우리가 그리스도의 종으로서 예수께 절대복종하는 신분에 있음을 잘 표현하기 위해서 “주인님”이라고 표기했다. 실제로 “주인님”으로 표기하는 것에서 오는 유익이 크다(그리스도의 ‘Lordship’을 이해하는 데도 좋다).
우리가 왜 우리 ‘주인님’의 십자가 수난을 깊이 묵상해야 하는가? 우리 주인님의 마음을 본받아 아버지 하나님께 순종하기 위함이다.
“너희 안에 이 마음을 품으라 곧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니 … 자기를 비어 종의 형체를 가져 사람들과 같이 되었고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셨으매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빌 2:5-8).
우리 주인님은 십자가를 앞두고 이렇게 기도하셨다.
“아버지여 만일 아버지의 뜻이어든 이 잔을 내게서 옮기시옵소서 그러나 내 원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원대로 되기를 원하나이다”(눅 22:42).
우리의 주인님이신 예수 그리스도는 아버지 하나님께 자신의 몸을 드리는 절대복종을 하셨다. 그렇다면 우리 주인님의 십자가 수난을 묵상하는 우리에게서는 어떤 열매가 나와야 하겠는가? 그리스도를 본받아 내 뜻보다는 아버지의 뜻에 복종하며, 나 자신을 매일 십자가의 산 제물로 바쳐야 할 것이다(롬 12:1 참조).
“제자가 그 선생보다, 또는 종이 그 상전보다 높지 못하다”(마 10:24)라고 예수께서 분명히 말씀하셨다. 그렇다면 우리의 선생이요 주인님이신 예수님이 가시 면류관을 쓰셨으므로 우리도 가시 면류관이나 그보다 천한 것을 쓰기를 갈망해야 되는데, 오늘 우리가 너도나도 황금 면류관, 즉 세상 갈채의 면류관, 인기의 면류관을 탐하는 것은 웬일인가? 그러면서 정통의 교리, 정통의 속죄론을 주장하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는가?
그것은 ‘죽은 정통’이다. 바른 십자가 속죄론은 바른 십자가의 삶, 즉 자기 십자가를 지는 삶의 길로 우리를 인도해야 한다.
사실상 오늘 한국 교계의 현실은 바른 십자가 속죄론에 대한 관심도 시들고 십자가를 지는 삶은 더더욱 찾아보기가 힘들게 되었다. 속죄론은 성공론으로 대체되었고, 자기부정의 십자가의 삶은 자아긍정의 삶으로 대체되고 말았다. 오늘 우리의 이런 현실에서 토마스 아 켐피스의 《주인님, 나를 바칩니다》는 우리를 우리 주인님께서 원하시는 바른 종의 길, 바른 제자도의 길로 인도해줄 것이다.
“누구든지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지 않는 자도 능히 나의 제자가 되지 못하리라”(눅 14:27).
오늘 우리 주인님을 향해 자신을 산 제물로 드릴 자가 누구인가? 바로 우리 주인님의 갈보리 산 제사로 새 생명을 얻은 우리가 아닌가?
“나 위해 죽으신 나의 주인님, 몸밖에 드릴 것 없어 이 몸 바칩니다.”
규장 편집국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