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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인들이 가장 두려워하는 것

자신의 연약한 무언가를 가리기 위해 끊임없이 몸부림친다.

 2018-12-1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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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은 하나님과 같이 되는 것을 가리켜 구체적으로, 선악을 아는 것이라고 표현하고 있는데 히브리 원어적인 의미는 단순히 아는 것이 아닌 분별 또는 판단하는 것을 포함한다.

즉 선과 악을 자기 스스로 분별하고 판단하는 자가 된다는 것이다.

하나님이 두신 절대적인 선과 악의 기준을 넘어 스스로 무엇이 선이고 무엇이 악인지 판단하는 자가 되어 더 이상 하나님의 간섭과 권위 아래 있기를 거부하는 것이다.

그 결과 선과 악을 분별하고 판단하는 자가 되었는가? 놀랍게도 되었다! 그러나 그 결과는 혼란이다. 절대적인 하나님의 기준을 떠나 스스로 선악을 분별하는 자가 되려다보니, 무엇을 기준으로 선과 악을 구분해야 할지 모호해지는 문제가 생겼다. 이것이 혼돈과 무질서이다.

죄로 인하여 분리된 사람의 영적, 심적 상태는 하나님의 속박으로부터 벗어나 완전한 자유를 누리게 되었는가? 오히려 그 반대다. 앞서 말한 그대로 죄는 하나님과 우리 사이를 분리시켰고, 하나님으로부터 분리된 사람의 영적, 심적 상태는 혼돈 그 자체가 되었으며 결론적으로 극심한 두려움에 잡히게 되었다.

아담과 하와가 죄를 지은 후 일어난 사건은 뱀이 유혹한 그대로였다.

너희 눈이 밝아져 하나님과 같이 되어 선악을 알 줄 하나님이 아심이니라 창 3:5

“선악과를 먹는 순간 눈이 밝아질 것이고, 그 밝아진 눈을 통해 하나님과 같이 될 것이고, 결과적으로 너희도 선악을 판단하는 자가 될 것이다.” 이것이 뱀의 유혹의 핵심이었다.

그래서 결과적으로 저들의 눈이 밝아졌는가? 밝아졌다.

이에 그들의 눈이 밝아져 자기들이 벗은 줄을 알고 무화과나무 잎을 엮어 치마로 삼았더라 창 3:7

그런데 밝아지자마자 저들이 깨달은 것은 자신들의 벌거벗은 모습이었다. 그전에 벗지 않았다거나 그렇게 보이지 않다가 갑자기 벗은 것이 보인 것인가? 아니다. 그전에도 벗었고 벗은 모습으로 하나님 앞에 나아가는 것이 아무 문제가 되지 않았다. 그런데 왜 갑자기 눈이 밝아져서 자기들의 벗은 것을 발견하고, 무화과나무 잎을 엮어 치마를 만들고, 하나님이 부르시자 나무 사이에 숨었는가? 무엇이 문제인가? 그전에도 벗었지 않은가? 왜 갑자기 난리를 떠느냐 말이다.

문제는 벗은 상태를 어떻게 평가할 것인가에 대한 인식, 즉 보는 눈이 새롭게 열렸다는 것이다. 안타깝게도 하나님께 불순종하고 선악과를 먹는 순간 사람은 죄의 영향으로 불완전하고 왜곡된 눈이 열리게 된다. 이전에는 아무 문제가 되지 않던 것이 이제는 수치스럽고, 그 모습으로 하나님 앞에 나아가는 것이 두렵고, 그래서 무화과나무 잎으로 가린 것이다(창 3:10).

여기서 일어난 사건은 두 가지이다. 먼저 벗은 것에 대한 새로운 인식의 눈이 열렸으나 안타깝게도 하나님의 기준과는 전혀 다르게 수치와 두려움이 일어난 것이다. 더 안타까운 것은 그것을 해결하고자 그들이 한 최선은 무화과나무 잎을 엮어 치마를 만들어서 몸을 가렸다는 것이다. 아니 그런다고 가려지느냐 말이다.

이 두려움은 그때나 지금이나 마찬가지다. 현대인들이 가장 두려워하는 것이 무엇인가? 자신의 연약함과 수치가 낱낱이 벌거벗겨져 자신의 벗은 모습이 드러나는 것이다. 그래서 자신의 수치와 연약함을 가리기 위해 몸부림친다.

한국 사회에서 젊은 세대들은 ‘스펙’(spec)이라는 무화과나무 잎으로 자신의 수치를 가리느라 정신이 없고, 기성세대들은 ‘성공’이라는 무화과나무 잎으로 자신의 연약한 무언가를 가리기 위해 끊임없이 몸부림친다.

원래 자유함으로 문제가 되지 않던 것이 이제는 문제가 되어버렸고, 그들이 가리기 위해 사용한 스펙과 성공이라는 무화과나무 잎은 금세 마르고 사라지기 때문에 현대인들은 또 다른 이름의 무화과나무 잎으로 계속해서 자신의 벗은 몸을 가리기 위해 애쓴다.

눈이 열려서 좋은가? 하나님의 간섭으로부터 독립하여 자유로운가? 오히려 반대다. 이 수치심과 두려움이 끊임없이 현대인들을 속박한다. 반대로 수치심과 두려움이 조금이나마 해결되면 사람들은 급변한다. 수치심과 두려움은 금세 자랑과 교만으로 충만해진다. 사실 이 두 가지는 같은 것이다. 죄로 인해 열린 눈이다. 잘못되고 비뚤어진 인식의 눈, 관점이다.

많은 사람들이 나누는 대화의 핵심이 무엇인가? 자신의 벗은 몸을 무엇으로 가렸는가에 모든 초점이 맞추어져 있다. 당신은 어떤가?

지금도 자신의 수치를 가리기 위해 몸부림치다가 무언가로 가릴 수 있는 무화과나무 잎을 발견하기만 하면 금세 교만해지고 담대해지지는 않는가? 자신을 가려주는 무성한 무화과나무 잎을 자랑하느라 여념이 없지 않은가? 하지만 시간이 지나고 그 무화과나무 잎이 마르면 다시 수치와 두려움에 잡혀 산다. 이 반복의 굴레를 자유라고 하는데 이것이 자유인가? 정말 안타까운 현실이다.

수치심과 두려움 때문에 숨는 아담과 하와를 위해 하나님은 무화과나무 잎과는 대조적인 가죽옷을 입혀주신다(창 3:21). 아담과 하와의 수치와 두려움을 가려주기 위해 피 흘려 가죽옷을 입혀주신 이 사건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피 흘림을 통해 우리의 영원한 수치와 두려움을 가려주실 사건에 대한 예표(豫表)였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복음을 통해 하나님의 자녀로 거듭난 우리는 다른 존재가 되었기 때문에 이 두려움으로부터 자유할 수 있다.

내가 주인 되었던 죄의 근본을 회개하며, 예수님께 나를 드리세요.
예수님을
나의 주인님으로 모시세요

사실 아무것도 바뀐 것은 없다. 그러나 우리를 덮고 있던 죄의 관점이 벗어지고 영의 관점이 새롭게 열린 것이다. 복음으로 거듭난 그리스도인은 자신의 어떠함 또는 수치와 연약함과 상관없이 하나님의 사랑을 받는 자, 존귀한 자로 인정받았음을 볼 수 있는 영의 눈이 열려 더 이상 수치스럽거나 두렵지 않다. 나의 존재를 더 의미 있고 고상하게 만들어줄 어떤 무화과나무 잎도 더 이상 필요 없는 놀라운 존재로 거듭났기 때문에 자유하다. 이전에 나의 모든 수치와 연약함이 오히려 놀라운 하나님의 역사를 위한 간증의 통로가 되지, 그런 것들이 더 이상 나를 평가하는 기준이 될 수는 없다. 예수 그리스도만이 나의 모든 평가의 기준이 되신다.

이것이 복음의 진리가 주는 자유함이다. 그리고 이 자유로 말미암아 우리는 평강을 누리는 것이다. 건강하고 성경적인 사람은 세상의 평가와 기준 자체를 초월한다. 그것으로부터 자유하다. 이 자유한 상태를 평강이라고 하고, 이 평강 가운데 있는 자들의 심령 안에서 흘러넘치는 것이 기쁨이다.

† 말씀
진리를 알지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롭게 하리라 - 요한복음 8장 32절

평안을 너희에게 끼치노니 곧 나의 평안을 너희에게 주노라 내가 너희에게 주는 것은 세상이 주는 것과 같지 아니하니라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도 말고 두려워하지도 말라 - 요한복음 14장 27절

† 기도
하나님, 스펙과 성공이라는 무화과나무 잎으로 연약함을 가리기 죽을 힘을 다하는 저의 모습을 봅니다. 이제는 제 안에 있는 두려움과 연약함, 수치심을 주님 앞에 내려놓겠습니다. 하나님의 자녀로 거듭날 때 다른 존재가 되어 두려움으로부터 자유할 수 있다는 말씀을 마음에 새기겠습니다. 예수님만이 나의 모든 평가 기준이 되게 하여 주옵소서.

† 적용과 결단
죄로 인해 들어온 두려움으로 매일 걱정하며 불안해하며 살았습니까? 복음으로 거듭난 그리스도인은 자신의 어떠한 수치와 연약함과 상관없이 하나님의 사랑받는 자, 존귀한 자가 되었습니다. 나를 평가하는 것은 세상의 기준이 아닙니다. 그것으로부터 자유하십시다. 오늘 하루 이 자유한 상태, 평강이 넘치는 하루 되시기를 기도합시다.




낭독으로 만나는 테마
귀로 들어요~ 갓피플 테마. 눈으로만 읽는 것과는 다른 은혜가 뿜뿜. 테마에 담긴 주님의 마음이 조금이라도 더 다양하고 새롭게 나누어지기를 기도하며, 갓피플 직원들이 직접 낭독했습니다. 어설퍼도 마음만은 진실한 낭독러랍니다^^ 같은 은혜가 나누어지기를...





† 지금 교회와 성도에게 필요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