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뿐 아니라 또한 우리 곧 성령의 처음 익은 열매를 받은 우리까지도 속으로 탄식하여 양자 될 것 곧 우리 몸의 속량을 기다리느니라 롬 8:23
어떤 사람들은 사도 바울이 여기서 우리가 장차 받게 될 복의 고상함을 과장해서 말하고자 했다고 생각한다. 왜냐하면 피조물 중에 이성이 없는 것들만이 아니라 하나님의 영으로 말미암아 중생한 우리 또한 간절한 마음으로 그 복을 바라기 때문이다.
이 견해가 사람들의 지지를 받을 수도 있지만, 내가 볼 때 바울은 더한 것과 덜한 것을 비교하고 있는 것 같다. 그는 마치 다음과 같이 말한 것 같다. “우리가 장차 받게 될 영광의 탁월함은 의식과 이성(理性)이 없는 피조물들에게까지도 매우 중요하기 때문에, 그것들도 그 영광을 열렬히 사모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하나님의 영으로 영적 조명을 받은 우리는, 우리 소망의 견고함을 붙들고 우리의 열정을 온전히 쏟아 부음으로써 훨씬 더 간절히 그토록 귀한 것을 갈망하면서 그것을 얻고자 애써야 하지 않겠는가?”
바울은 신자들 안에 두 종류의 감정이 필요하다고 이야기한다. 우선 그들은 ‘탄식해야’ 한다. 왜냐하면 그들은 현재의 비참함을 의식함으로써 괴로움을 당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들은 자기들이 해방될 것을 인내하며 ‘기다려야’ 한다. 그는 그들이 장차 얻게 될 복을 기대함으로 힘을 얻기를, 그리고 눈앞의 현실 너머 높은 곳에 마음을 둠으로써 현재의 모든 괴로움을 이겨내기를 바란다.
그리하여 그들이 현재 자기들이 어떤 상태에 있는지가 아니라 앞으로 어떤 상태가 될 것인지에 마음을 쓸 수 있었으면 하는 것이다.
나는 ‘처음 익은 열매’(primitias)라는 단어를 흔하지 않으며 주목할 만한 탁월한 것으로 설명하는 사람들의 해석이 전혀 마음에 들지 않는다. 그러므로 모호함을 피하기 위해서 나는 그 단어를 ‘시작 단계의 것’(primordia)이라고 번역하고 싶었다.
나는 이들 해석자들처럼 이 표현이 사도들에게만 해당된다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오히려 이 세상에서 겨우 몇 방울의 성령으로 뿌림을 받아 깨끗함을 얻게 된 모든 신자들에게 적용되는 것 같다.
혹은 탁월한 신앙의 진보를 이루기도 하고 많은 양의 성령을 부여받기도 했지만 여전히 온전함에서는 거리가 먼 사람들에게도 적용할 수 있을 것 같다.
그러므로 사도 바울에게 이러한 사람들은, 완전히 수확이 끝난 것들과는 대조되는 시작 단계의 것 또는 처음 익은 열매이다. 성령의 충만함이 아직 우리에게 주어지지 않았기 때문에,
우리가 불안함을 느끼는 것은 이상한 일이 아니다. 바울은 강조하기 위해서 ‘우리’라는 말을 반복하고 ‘우리 안에서’라는 말을 덧붙인다(우리말 성경에는 ‘속으로’라고 번역되어 있다 - 역자 주).
다시 말하면 우리의 욕구를 좀더 강렬하게 표현하기 위해서 그렇게 한 것이다. 그러나 그는 단순히 그것을 욕구라고 부르지 않고 ‘탄식’이라고 표현한다. 왜냐하면 우리는 자신의 비참함을 의식할 때마다 항상 ‘탄식하기’ 때문이다.
바울은 여기서 우리의 ‘양자 됨’을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로 입양되었을 때 받도록 되어 있는 그 기업을 누리는 것으로 언급하는데, 그것은 적절하지 않다. 그러나 그가 그렇게 한 데는 그럴 만한 충분한 이유가 있다.
왜냐하면 그는 하나님이 정하신 영원한 뜻의 극치인 약속된 부활이 확실하지 않다면, 그분의 뜻은 쓸모없게 될 것임을 나타내고자 했기 때문이다.
세상의 기초가 놓이기 전에, 하나님께서는 이 영원한 뜻에 따라 우리를 그분의 아들로 택하셨다. 그리고 그분은 복음을 통해서 이 사실에 대해 우리에게 증거하시며, 그분의 영으로 말미암아 우리 마음 가운데 그것에 대한 믿음을 인쳐주신다.
우리가 이 땅에서의 순례를 마치고 나서 하늘의 기업을 받지 못한다면, 하나님께서 우리의 아버지이신 이유가 무엇이겠는가? 그가 곧바로 추가하는 ‘우리 몸의 속량’이라는 어구도 이와 동일한 내용을 가리킨다.
우리를 구속(救贖)하는 데 필요한 값은 그리스도에 의해 치러졌다. 그러나 사망은 여전히 그 쇠사슬로 우리를 붙들어두고 있다.
사실 우리는 사망의 잔재(殘在)를 우리 안에 지니고 다닌다. 그리스도의 죽음으로 드려진 희생제사의 열매가 우리가 천상天上의 삶으로 새로워지는 것에서 드러나지 않는다면, 그분의 죽으심은 효과가 없는 헛된 일이 될 것이라는 결론이 여기서 내려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