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조물이 다 이제까지 함께 탄식하며 함께 고통을 겪고 있는 것을 우리가 아느니라 롬 8:22
그는 피조물 이야기에서 우리 자신의 경우로 옮겨오기 위해서 같은 명제를 반복한다. 그러나 그가 지금 말하는 것은 결론의 효과와 형식을 취하고 있다. 피조물들은 자기들 본래의 욕구에 의해서가 아니라 하나님이 정해주셨기 때문에 썩어짐의 종 노릇을 하고 있다. 그리고 피조물들은 장차 썩어짐에서 해방될 것에 대한 소망을 품고 있다.
그러므로 여인이 해산(解産)하기까지 산고(産苦)를 겪으며 신음하는 것처럼 피조물들도 그렇게 탄식한다는 결론을 내릴 수 있다(우리말 성경에는 ‘고통을 겪고 있는 것’이라고 번역되어 있어서 그것이 해산의 고통을 나타낸다는 뉘앙스가 담겨 있지 않지만, 칼빈이 인용한 성경에 나온 단어 ‘travail’는 ‘산고’라는 의미를 담고 있다 - 역자 주).
이것은 그가 이야기하고 있는 탄식이 헛되거나 무익한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우리에게 알려주는 가장 적절한 비유이다. 그 탄식은 결국 기쁨에 넘치는 복된 열매를 맺을 것이다.
요약하자면, 피조물들은 자기들의 현재 상태에 만족하지 않는다. 그렇다고 해서 회복할 수 없을 만큼 초췌해질 정도로 고통스러워하는 것은 아니다.
피조물들은 더 나은 상태로 회복되기를 기다리고 있기 때문에 고통 중에 있다. 그가 ‘함께 탄식하며’라는 표현을 쓴 것은 피조물들이 우리와 동일한 걱정거리를 가지고 있다는 의미가 아니라, 고통이라는 과정을 같이 경험하는 동반자로서 피조물들을 우리와 연결시키는 것이다.
‘이제까지’라는 불변화사는 우리가 매일 경험하는 답답함과 지루함을 감소시키는 데 도움이 된다. 만일 피조물들이 그토록 오랫동안 계속해서 탄식했다면, 우리가 그림자 같은 짧은 인생을 살면서 쇠약해진다는 것은 도무지 그 유약함과 나태함을 변명할 길이 없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