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조물이 고대하는 바는 하나님의 아들들이 나타나는 것이니 롬 8:19
바울은 우리에게 인내하라고 권면하면서, 말 못하는 피조물들에게서도 그 인내의 실례를 찾아볼 수 있다고 우리에게 가르친다. 나는 이 구절에 대한 여러 가지 해석들을 생략하고, 그것을 다음과 같은 의미로 이해하고자 한다.
“세상의 모든 피조물 중에서, 현재의 비참함을 깨닫고 괴로워하느라 부활에 대한 간절한 소망을 가지지 않는 피조물은 그 어디에도 없다.” 바울은 두 가지 진리를 언급하는데, 하나는 모든 피조물이 고통을 당한다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피조물들이 소망으로 말미암아 보존되고 있다는 것이다.
여기서도 우리는 영원한 영광이 헤아릴 수 없이 귀하다는 것을 알게 된다. 만물을 자극하여 그 영광을 소망하도록 만들 만큼 그 영광은 귀하다.
나아가서 ‘고대하는’이라는 단어는 약간 이례적인 표현이기는 하지만 가장 적절한 의미를 가지고 있다. 바울이 나타내고 싶어 했던 의미는, 굉장한 불안감에 시달리면서 강한 열망으로 마음을 졸이고 있는 피조물들이 하나님의 아들들의 영광이 공개적으로 드러날 날을 바라고 있다는 것이다.
그는 우리가 하나님과 같이 되는 때를 ‘하나님의 아들들이 나타나는 것’이라고 표현하는데, 이는 요한이 말한 것과 같다. “우리가 지금은 하나님의 자녀라 장래에 어떻게 될지는 아직 나타나지 아니하였으나 그가 나타나시면 우리가 그와 같을 줄을 아는 것은”(요일 3:2).
나는 바울이 사용한 어구를 그대로 두었다. 왜냐하면 내 생각에 에라스무스가 사용한 ‘하나님의 아들들이 나타나기까지’라는 표현은 사도 바울의 마음을 충분히 표현하지 않은 채 이 어구가 허용하는 것 이상으로 대담하게 번역한 것 같기 때문이다.
바울은 하나님의 아들들이 마지막 날에 나타날 것이라는 의미가 아니라, 그들이 자기들의 부패함을 벗어버리고 하늘의 영광으로 옷 입게 될 때 얼마나 바람직하고 행복한 상태에 있게 되는지 알려질 것이라는 의미로 말한 것이다.
그는 이성(理性)이 없는 피조물들이 소망을 가지고 있다고 표현한다. 이는 신자들로 하여금 눈을 열어 보이지 않는 생명을 보도록 하기 위함이다. 그 생명이 보잘것없는 옷 아래 감추어져 있더라도 볼 수 있도록 하기 위함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