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빈주석 로마서
8장

로마서 8장 16절 칼빈 주석

성령이 친히 우리의 영과 더불어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인 것을 증언하시나니 롬 8:16

성령이 친히 … 증언하시나니

그는 하나님의 영이 우리 영의 증인이시라고 단순하게 말하지 않고, 라틴어로 ‘contestatur’(영어의 contests, 증거하다)라고 번역될 수 있는 복합 동사를 사용한다. 라틴어 ‘contestatio’(증거)가 다른 의미를 가지는 것이 아니라는 전제 아래서 하는 말이다.

바울이 나타내고자 하는 의미는, 하나님의 영이 우리에게 너무도 강력한 증언을 해주시기 때문에, 그분이 우리의 안내자와 교사가 되실 때 우리의 영은 하나님께서 우리를 양자 삼으신 것을 확신하게 된다는 것이다.

성령께서 먼저 증언해주시지 않으면, 우리 마음이 저절로 우리에게 이 양자됨의 확신을 전해주지는 않을 것이다. 또한 이 구절은 앞 절 말씀에 대한 설명이기도 하다.

왜냐하면 성령께서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임을 우리에게 증언하실 때, 동시에 그분은 이 확신을 우리 마음에 부어주심으로써 우리로 하여금 담대하게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를 수 있도록 하시기 때문이다. 마음의 확신이 있을 때만 우리의 입술이 열리는 것은 분명하다.

그러므로 성령께서 우리 마음에 하나님의 아버지 같은 사랑에 대해 증언하시지 않는다면, 우리의 혀는 말문이 막혀서 기도를 하지 못할 것이다.

우리는 항상 다음과 같은 원리를 고수해야 한다. 즉, 우리가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를 때 우리 마음 가운데 그분이 우리의 아버지 되신다는 분명한 확신이 없다면, 그것은 우리가 하나님께 올바르게 기도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이에 상응하는 또 다른 원리는, 우리가 하나님의 이름을 부를 때만 우리의 믿음이 입증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바울이 우리에게 이런 기준을 상기시키면서, 은혜의 약속을 받은 모든 신자들이 기도에 힘쓸 때만 그들의 믿음이 얼마나 진실한지 알 수 있다고 설명하는 데는 그럴 만한 이유가 있다.

이 구절은 도덕적 추측에 관한 궤변가들의 얄팍한 논증을 보기 좋게 반박한다.

그들이 말하는 도덕적 추측은 마음의 불확실함과 걱정, 아니 좀더 정확히 말하면 마음의 동요와 망상에 불과하다. 그들은 어떻게 사람이 하나님의 뜻에 대해서 온전히 확신할 수 있냐면서 이의를 제기하기도 하는데, 이 구절에는 그것에 대한 답도 제시되어 있다.

그러나 이 확실성은 사람의 능력이 미치는 범위 안에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영이 증거하는 것이다. 이에 대해서 바울은 고린도전서에서 좀더 충분하게 논의한다.

고린도전서는 또한 이 구절에 대한 좀더 자세한 설명을 해주기도 한다. 그러므로 하나님을 아버지로 인정하지 않는 사람은 어느 누구도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불릴 수 없다는 명제는 변함이 없다. 요한은 이 인정(認定)을 ‘아는 것’이라는 말로 표현하는데, 이는 그 확실성을 표현하기 위함이다(요일 5:19, 2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