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희는 다시 무서워하는 종의 영을 받지 아니하고 양자의 영을 받았으므로 우리가 아빠 아버지라고 부르짖느니라 롬 8:15
바울은 이미 신자들에게 구원에 대한 확신을 분명하게 가지고 있으라고 명했는데, 이제 성령께서 만들어내는 특별한 효과를 언급함으로써 그 확신의 필연성을 확증한다.
성령께서는 우리를 두려움으로 괴롭게 하거나 불안함으로 고통스럽게 하기 위해서 주어진 것이 아니다. 오히려 우리의 걱정을 가라앉히고 우리 마음을 고요한 상태로 회복시키며 확신과 자유함으로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도록 우리를 각성시키기 위해서 성령께서 주어진 것이다.
그러므로 바울은 자기가 전에 가볍게 언급했던 논증을 발전시켜 나갈 뿐만 아니라 동시에 자기가 이 논증과 관련지었던 다른 구문, 즉 하나님의 아버지 같은 관대함에 대해서 좀더 자세히 다룬다.
아버지 같은 이 관대함을 통해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백성들이 가지고 있는 육신의 연약함과 그들 안에 여전히 남아 있는 죄를 용서하신다. 우리가 하나님의 이 용서하심에 대해 분명한 확신을 가지게 되는 것은 양자의 영으로 말미암아서라고, 바울은 우리에게 가르쳐준다.
그 양자의 영이 우리에게 담대하게 기도하라고 명할 때는 반드시 우리에게 값없는 용서를 보증해준다.
이 사실을 좀더 분명하게 하기 위해서 바울은 두 종류의 영이 있음을 언급한다. 하나는 그가 ‘종의 영’이라고 부르는 것으로, 우리가 율법에서 끌어낼 수 있는 영이다. 다른 하나는 ‘양자의 영’으로 복음에서 나오는 영이다. 이전에는 무서움을 가지게 하는 종의 영이 주어졌고 지금은 확신을 가지게 하는 양자의 영이 주어진다고 그는 진술한다. 우리가 보는 것처럼, 그가 확증하기 원하는 우리 구원의 확실성은 이렇게 반대되는 두 영을 비교함으로써 훨씬 더 확연해진다.
이 동일한 비교가 히브리서 기자에 의해서도 사용되고 있다. 그는 “우리가 시내산에 이른 것이 아니다. 거기는 모든 것이 너무도 무서워서, 사람들은 그 자리에서 사망 선고를 들은 것처럼 두려워하며 더 이상 자기들에게 말씀하지 않기를 구했다. 그리고 모세 자신도 심히 두렵고 떨린다고 고백했다”고 말한다(히 12:18 이하).
“그러나 너희가 이른 곳은 시온산과 살아계신 하나님의 도성(都城)인 하늘의 예루살렘과 … 새 언약의 중보자이신 예수 … 니라”(히 12:22-24).
‘다시’라는 부사를 사용한 것을 보면, 바울이 여기서 율법과 복음을 비교하고 있음을 알게 된다. 우리는 더 이상 율법에 매여 노예와 같은 비천한 상태에 있지 않아도 된다. 이것은 하나님의 아들이 자신의 강림하심으로 말미암아 우리에게 가져다주신 더없이 귀중한 은총이다.
그러나 이 사실을 근거로, 그리스도께서 오시기 전에는 아무도 양자의 영을 받지 않았다거나 율법을 받은 사람들은 모두 하나님의 아들이 아니라 종이었다고 추론해서는 안 된다. 바울은 그리스도께서 오시기 이전의 사람들과 이후의 사람들을 비교하는 것이라기보다는 율법의 직무와 복음의 은혜를 비교하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옛 언약 아래 있던 족장들을 대하시던 것과 비교해 볼 때, 바울이 그분의 관대하심을 신자들에게 상기시키고 있다는 것은 맞는 말이다. 그러나 밖으로 드러나는 은혜라는 관점에서 그렇다는 이야기이다.
이 관점에서만 본다면, 우리는 구약 시대의 족장들보다 나은 위치에 있는 것이다. 왜냐하면 아브라함과 모세와 다윗의 신앙이 우리의 신앙보다 훨씬 탁월하기는 했지만, 하나님께서 그들을 ‘초등 교사’ 아래 두셨기에 그들은 우리에게 계시된 자유를 얻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동시에 우리는, 거짓 사도들 때문에 바울이 말 그대로의 율법의 제자들과 신자들을 의도적으로 대조하고 있다는 점을 주목해야 한다. 신자들의 하늘 선생이신 그리스도께서는 자신의 입에서 나오는 말씀으로 그들에게 말씀하실 뿐만 아니라 자신의 영으로 말미암아 그들을 내적으로 또한 효과적으로 가르치시기도 한다.
율법에 은혜의 언약이 들어 있기는 하지만, 바울은 율법에서 그 부분을 제한다. 왜냐하면 복음을 율법에 대비되게 설정하면서 그는 오직 율법 자체에만 특별하게 해당되는 특성들, 즉 명령과 금지, 그리고 죽음에 대한 위협으로 범법자들을 규제하는 것에만 주의를 기울이기 때문이다.
그는 복음과 구별되는, 율법만이 가지는 고유의 특성을 율법에 부여하는 것이다. 그러나 어떤 사람들은 다음과 같은 진술이 더 낫다고 생각할지도 모른다. “율법에는 하나님께서 행위와 관련해서 우리와 언약을 맺으시는 부분이 있는데, 그는 율법의 그 부분만을 언급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사람들에 관해 다음과 같이 생각해야 한다. “율법이 유대인들 사이에서 공표되었을 때 그리고 그 이후에, 경건한 자들은 동일한 믿음의 영으로 말미암아 영적으로 조명(照明)을 받았다. 그러므로 성령께서 확실하게 보증하시는 영원한 기업에 대한 소망이 그들의 가슴에 인쳐진 것이다. 유일한 차이가 있다면, 성령이 그리스도의 나라에서 더 풍성하게 넘치도록 부은 바 된다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가 구원의 교리가 전해진 것 자체에 주의를 기울인다면, 그리스도께서 육신을 입고 나타나셨을 때 구원이 처음으로 확실하게 계시된 것처럼 보일 것이다. 복음의 분명한 빛과 비교할 때, 구약에서는 모든 것들이 굉장히 희미한 상태로 가려져 있었던 것이다.
끝으로 율법 자체만 보면, 그것은 율법의 비참한 굴레 아래 있는 사람들을 죽음에 대한 공포로 묶어놓는 일밖에 할 수가 없다. 왜냐하면 율법은 조건적인 복福 외에는 아무런 복도 약속하지 않으며, 율법을 범한 모든 자들에게는 사망을 선고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율법 아래에는 두려움으로 양심을 억누르는 종의 영이 있는 것이고, 복음 아래에는 우리의 구원에 대해 증거함으로써 우리 영혼을 기쁘게 하는 양자(養子)의 영이 있다. 바울이 두려움을 종의 처지와 연결시키고 있음을 주목하라.
왜냐하면 율법이 그 지배력을 행사하는 한, 그것은 지독한 불안으로 우리의 영혼을 괴롭히고 고통스럽게 하는 것밖에 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우리의 죄를 용서하시고 자녀를 대하는 아버지처럼 우리를 다정하게 대해주시는 것 외에는 우리의 영혼을 가라앉힐 만한 다른 치료책이 전혀 없다.
모든 성도들이 공통적으로 누리는 특권을 표현하기 위해서, 바울은 ‘너희’라는 2인칭에서 ‘우리’라는 1인칭으로 바꾼다. 그는 이렇게 말하고 있다. “너희는 성령을 받았고, 그 성령을 통해 너희와 나머지 우리 모든 신자들은 … 라고 부르짖느니라.”
아이가 자기 아버지에게 하는 말을 그대로 흉내 내서 표현한 것은 그 어조가 매우 강하다. 왜냐하면 바울은 신자들의 이름으로 ‘아버지’라는 단어를 사용하기 때문이다. 다른 단어를 사용해서 아버지라는 이름을 반복한 것은 부연 설명하기 위해서이다.
바울이 의미하는 것은, 하나님의 자비가 이제는 전 세계에 두루 퍼져서 어거스틴이 말한 대로 사람들이 모든 언어로 구별 없이 하나님께 기도할 정도가 되었다는 것이다. 바울이 의도한 바는 모든 나라들 사이에 존재하는 일치를 표현하는 것이다. 여기서 결론지을 수 있는 것은 유대인과 이방인 사이에 이제는 더 이상 구별이 없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그들은 하나가 되었기 때문이다.
이사야 선지자는 다른 표현을 사용해서, 모든 사람이 가나안 방언을 말할 것이라고 선언한다(사 19:18). 그러나 그 의미는 동일하다. 그는 겉으로 드러나는 언어의 형태에 대해서 언급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예배하는 측면에서의 마음의 일치와 그분에 대한 참되고 순전한 경배를 드리는 측면에서의 있는 그대로의 동일한 열심을 가리키고 있다. ‘부르짖느니라’라는 단어는 확신을 표현하기 위해서 사용되고 있다.
그는 마치 이렇게 말하는 것 같다. “우리는 의심을 품고 기도하는 것이 아니라, 두려움 없이 하늘을 향해 크게 소리를 높인다.”
율법 아래 있는 신자들도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불렀지만, 그것은 앞에서 언급한 그런 자유로운 확신을 가지고 한 것이 아니다. 왜냐하면 휘장이 드리워져 있어서 그들은 지성소로부터 멀리 떨어져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제 그리스도의 보혈로 말미암아 하나님께로 나아가는 문이 우리에게 열렸으므로, 우리는 우리가 하나님의 아들들임을 당당하게 큰 목소리로 외치며 기뻐할 수 있게 되었다.
그래서 우리는 이렇게 ‘아빠 아버지’라고 부르짖는 것이다. 이런 식으로 해서 호세아의 예언도 성취된다. “내 백성 아니었던 자에게 향하여 이르기를 너는 내 백성이라 하리니 그들은 이르기를 주는 내 하나님이시라 하리라”(호 2:23). 그 약속이 분명할수록, 기도 중에 우리가 느끼는 자유함도 더 커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