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일 너희 속에 하나님의 영이 거하시면 너희가 육신에 있지 아니하고 영에 있나니 누구든지 그리스도의 영이 없으면 그리스도의 사람이 아니라 롬 8:9
바울은 이 서신을 받아볼 사람들에게 보편적인 진리를 가언적假言的으로 적용한다. 이는 자기 논증을 특별히 그들에게 관련시킴으로써 그들에게 좀더 강한 영향을 미치기 위함이다.
그뿐만 아니라 바로 앞에 정의(定義)된 내용에서, 그리스도께서 율법의 저주를 제거하신 사람들의 무리에 자기들이 속해 있다는 사실을 그들이 확실하게 알 수 있도록 하기 위함이기도 하다.
그러나 바울은 또한 하나님의 영이 택함 받은 자들 안에서 어떤 능력으로 역사하시는지, 그리고 어떤 열매를 맺으시는지 설명함으로써, 그들에게 새 생명을 추구하도록 권면하기도 한다.
그들로 하여금 스스로를 좀더 면밀히 살펴보도록 자극하기 위해서, 바울은 적절하게 수정한 문장을 덧붙인다.
이는 그들이 그리스도의 이름을 헛되이 고백하는 일이 없도록 하기 위해서이다. 하나님의 아들들이 세상의 자녀와 구별되는 가장 확실한 표는 그들이 하나님의 영으로 말미암아 중생함으로써 순결함과 거룩함에 이르는 것이다.
그러나 그의 의도는 위선적(僞善的) 행위를 바로잡는 것이라기보다는, 율법에 생명을 공급하는 성령의 내적 능력보다 죽은 율법 조문을 더 중요하게 여기는 어리석은 율법 광신주의자들에 대항해서 신자들이 어떤 자랑을 할 수 있는지 그 이유를 제시하려는 것 같다.
또한 이 어구는 바울이 지금까지 ‘영’이라는 단어를, 자유의지 옹호자들이 영혼의 우수한 부분이라고 부르는 ‘생각’이나 ‘이해력’이라는 의미가 아니라 ‘하늘의 선물’이라는 뜻으로 사용했음을 가르쳐준다.
영적인 사람은 하나님의 영에 의해 지배를 받는 사람들이지 자기 자신이 원하는 대로 이성(理性)을 따르는 사람들이 아니라고, 그는 설명한다.
그러나 이 영적인 사람들은 하나님의 영이 충만하기 때문이 아니라(이런 일은 오늘날 어느 누구에게도 일어나지 않는다) 그들 안에 하나님의 영이 거하기 때문에 ‘영을 따르는’ 자들이라고 일컬어진다.
물론 그들은 자기들 안에 거하는 약간의 육신의 잔재를 발견한다. 그러나 성령께서 그들 안에 거하시면 반드시 더 중요한 기능들을 장악하신다. 인간의 상태는 어떤 세력이 그를 지배하느냐에 따라 다른 이름으로 불린다는 사실을 여기서 주목해야 한다.
그리스도인들이 육신을 부인하는 것이 얼마나 불가피한 일인지 보여주기 위해서 그는 이 어구를 덧붙인다. 성령의 통치는 곧 육신을 폐하는 것이다. 성령의 다스림을 받지 않는 사람들은 그리스도께 속한 것이 아니다. 그러므로 육신을 섬기는 자들은 그리스도인이 아닌 것이다.
왜냐하면 그리스도를 그분의 영과 분리하는 자들은 그분을 죽은 형상이나 시체처럼 간주하기 때문이다. 우리는 ‘값없는 죄 사함의 은혜는 중생의 영과 분리될 수 없다’는 사도 바울의 권고를 항상 기억해야 한다. 그러므로 그리스도를 그분의 영과 분리시키는 것은 이를테면 그리스도를 두 동강 내는 일이 될 것이다.
이것이 사실이라면, 우리가 그리스도의 영이 우리 안에 거하신다고 감히 고백한다고 해서 복음을 대적하는 자들이 우리를 오만하다고 비난하는 것은 이상한 일이다. 우리는 그리스도를 부인하든지, 아니면 그분의 영으로 우리가 그리스도인이 된다고 고백하든지 해야 한다.
인간이 주님의 말씀에서 너무도 멀어져 있어서, 자기들이 하나님의 영이 없는 그리스도인들이라고 자랑할 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의 신앙을 조롱한다고 하니 참으로 무서운 일이다. 그러나 이것이 바로 교황주의자들의 철학이다.
여기서 우리 독자들은, 성령께서 특별한 구분 없이 어떤 경우에는 하나님의 영으로 또 어떤 경우에는 그리스도의 영으로 언급된다는 사실을 주목해야 한다.
이것은 성령의 온전한 충만함이 우리의 중재자이시고 머리이신 그리스도께 부어짐으로써, 우리 각 사람이 그분에게서 자신의 분량을 받게 되어 있기 때문이다. 또한 동일한 성령께서 아버지와 아들에게 같이 계시기 때문이기도 하다.
사실 성부 하나님과 성자 하나님은 하나의 본체를 가지고 계시며 영원한 신성(神性)을 동일하게 가지고 계신다. 그러나 우리는 그리스도로 말미암지 않고는 하나님과 교통하지 못하기 때문에, 사도 바울이 좀더 멀리 계신 것처럼 보이는 아버지 하나님을 먼저 언급하고 그리스도께로 옮겨간 것은 지혜로운 처사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