육신의 생각은 하나님과 원수가 되나니 이는 하나님의 법에 굴복하지 아니할 뿐 아니라 할 수도 없음이라 롬 8:7
그는 ‘우리 육신의 수고를 통해서는 사망밖에 나올 수 없다’는 앞서 제시한 명제에 대한 증거를 덧붙인다. 즉, 우리 육신의 수고가 하나님의 뜻과 반대되기 때문에 그렇다는 것이다. 하나님의 뜻은 의(義)의 규범이다. 그러므로 그 뜻에 반하는 것은 무엇이든 불의(不義)하다.
불의한 것이라면 그것은 또한 사망을 초래하게 된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반대하시고 적대적으로 대하시면, 우리가 생명을 바라는 것은 헛된 일일 뿐이다. 하나님의 진노에는 반드시 곧바로 사망이 뒤따르게 되어 있기 때문이다. 사망은 그분의 진노에서 나오는 보응이다.
여기서 인간의 뜻은 모든 면에서 하나님의 뜻과 반대된다는 점을 주목하자. 왜냐하면 타락과 고결함 사이에 있는 차이만큼 엄청난 차이가 우리와 하나님 사이에 있는 것이 분명하기 때문이다.
이것은 앞 문장에 대한 해석으로서, 어떻게 육신의 모든 생각이 하나님의 뜻과 불화(不和)하게 되는지를 보여준다. 즉, 하나님께서 자신의 뜻을 계시하신 곳에서만 우리는 그 뜻을 찾을 수 있기 때문이다.
하나님께서는 자신이 기뻐하시는 것이 무엇인지 율법을 통해 우리에게 보여주신다. 그러므로 자기가 얼마나 하나님과 일치를 이루고 있는지 정확하게 살피기를 원하는 사람은 율법에 나타난 기준에 따라 자기 마음의 뜻과 실제 행동을 평가하는 것이다.
물론 이 세상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들이 은밀히 통치하시는 하나님의 섭리에 따라서 되는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이것을 구실로 삼아서 하나님의 허락 없이는 어떤 일도 일어나지 않는다고 말하는 것은 지나친 신성모독이다.
율법이 우리의 눈앞에 분명하게 구별해서 제시해주는 옳고 그름의 차이를 깊은 미궁 속에서 찾는 것은 얼마나 어리석은 일인가! 내가 말했듯이, 주님께서는 참으로 그분만의 은밀한 계획을 가지고 계시고, 그 계획에 따라 만물을 그분이 기뻐하시는 대로 규제하신다.
그러나 우리가 하나님의 그 은밀한 계획을 알 수 없기 때문에, 그것을 알려고 너무 호기심을 발동시켜서는 안 된다는 사실을 깨달아야 한다.
동시에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것은 의(義)밖에 없으며, 우리는 율법에 의해서만 우리 행위에 대해 바른 판단을 내릴 수 있다는 이 진리는 불변(不變)하는 것으로 남겨두자. 하나님께서는 자신이 승인하시는 것과 그렇지 않은 것을 정확히 율법에 증거하셨다.
궤변가들이 찬양해 마지않는 자유의지의 능력이란 이런 것이다! 여기서 바울은 궤변가들이 공공연하게 싫어하는 내용을 명백하게 단언하고 있음이 분명하다. 즉, 우리가 우리의 감정을 율법에 복종시키는 것은 불가능하다.
그들은 자랑하기를, 성령의 감화로 말미암아 도움을 얻으면 우리는 어떤 쪽으로든 마음먹을 수 있다고, 그리고 성령께서 도와주시기만 한다면 우리는 선악간의 자유로운 선택을 할 능력이 있다고 한다. 그러나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은 선택 혹은 거절이다.
그들은 또한 우리 안에 좋은 감정들이 있으며, 그 감정들에 의해서 우리는 저절로 자유의지를 사용할 준비를 갖추게 된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바울은 우리의 마음이 도무지 꺾을 수 없는 강퍅함과 완고함으로 가득 차 있어서, 결코 하나님의 멍에를 쉽게 지려고 하지 않는다고 선언한다.
그는 한두 가지 감정에 대해서 논증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 안에서 일어나는 모든 감정들을 포괄하는 부정(不定)의 표현을 사용한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의 마음에서 자유의지에 대한 비기독교적인 철학을 멀리 몰아내자. 그리고 우리 각 사람이 죄의 종이라는 것이 사실이므로, 그것을 인정함으로써 그리스도의 은혜로 말미암아 죄에서 해방되어 자유하게 되도록 하자.
그리스도의 은혜로 인한 자유가 아닌 다른 자유를 자랑하는 것은 어리석음의 극치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