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빈주석 로마서
8장

로마서 8장 3절 칼빈 주석

율법이 육신으로 말미암아 연약하여 할 수 없는 그것을 하나님은 하시나니 곧 죄로 말미암아 자기 아들을 죄 있는 육신의 모양으로 보내어 육신에 죄를 정하사 롬 8:3

율법이 … 할 수 없는 그것을

이제 그가 제시한 증거에 대한 자세한 설명이 이어진다. 즉, 주님께서 그분의 값없는 자비로 말미암아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의롭다 칭하셨다는 것이다. 이것은 율법이 할 수 없는 일이었다. 이 문장은 크게 주목할 만하므로 각 부분을 자세히 살펴보기로 하자.

4절에서 바울은 ‘육신을 따르지 않고 그 영을 따라 행하는’이라는 표현을 덧붙인다. 이 표현을 통해 우리는, 여기서 그가 값없는 칭의(稱義)에 대해서 혹은 하나님께서 우리를 그분과 화목하게 하시는 수단인 용서에 대해서 다루고 있다는 사실을 추론할 수 있다.

만일 바울이 우리가 중생의 영으로 말미암아 죄를 이기는 방법을 배운다는 것을 가르치고자 했다면, 왜 이 표현을 덧붙였겠는가?

그러나 그가 신자들에게 값없는 죄의 사면을 약속하고 나서, 회개에 동참함으로 믿음에 이르게 된 사람들과 육신에 탐닉함으로써 하나님의 자비를 오용하는 일이 없는 사람들에게 이 교리를 한정시킨 것은 아주 잘한 일이다. 이제 우리는 여기에 제시된 주장의 근거를 살펴보아야 한다.

사도 바울은 어떻게 그리스도의 은혜가 우리에게서 죄에 대한 책임을 면하게 해주는지 가르쳐준다.

‘율법이 할 수 없는 것’이라는 어구의 헬라어 표현인 ‘토 아뒤나톤’(to adynaton)은 ‘결함’ 혹은 ‘무능’이라는 의미임이 틀림없다. 마치 바울은 하나님께서 치료책을 찾으셔서 그것으로 율법이 할 수 없는 것을 제거하셨다고 말한 것 같다.

에라스무스는 불변화사 ‘엔 호’(en ho)를 ‘~한 그 부분에서’(ea parte qua)라고 번역했다(우리말 성경에서 ‘육신으로 말미암아’라고 번역된 부분에서 ‘말미암아’에 해당하는 단어를 가리키는 것이다 - 역자 주).

그러나 나는 그 단어가 원인을 나타낸다고 생각하기에 ‘~ 때문에’(eo quod)라고 풀이하는 쪽을 택했다. 아마도 헬라어에 정통한 작가들은 이러한 표현을 사용하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사도 바울은 도처에서 히브리적 표현 방식을 사용하기 때문에, 이를 부적절한 해석으로 여겨서는 안 된다. 지각 있는 독자들은 바울이 여기서 율법의 결함의 원인을 표현하고 있다는 사실을 분명 인정할 것이다.

이 점에 대해서는 곧 다시 언급할 것이다. 에라스무스는 주동사(主動詞)를 집어넣지만, 내가 볼 때는 그 동사가 없어도 본문이 아주 자연스럽게 흘러가는 것 같다. 에라스무스는 연결사 ‘카이’(kai, 그리고) 때문에 헷갈려서 ‘praestitit’(행하다, 영어의 has performed)라는 동사를 삽입한 것이다.

그러나 내가 볼 때 그 연결사는 부연 설명을 위해서 사용된 것 같다. 혹 ‘곧 죄로 말미암아’라는 표현을 ‘하나님은 자기 아들을 죄 있는 육신의 모양으로 보내어’라는 선행 어구와 연결시키는 그의 억측을 누군가 인정한다면, 이야기가 달라질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나는 바울이 진정으로 나타내고자 한 의미라고 생각되는 것을 따랐다. 이제 그 주제 자체를 살펴보자.

바울은 우리의 죄가 그리스도의 죽으심으로 말미암아 대속되었다고 분명하게 단언한다. 왜냐하면 율법은 우리에게 의를 부여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여기서 우리가 내릴 수 있는 결론은 율법이 우리가 행할 수 있는 것 이상을 명한다는 것이다.

만일 우리가 율법의 요구를 만족시킬 수 있다면, 다른 곳에서 우리 죄에 대한 치료책을 구할 필요가 없을 것이다. 그러므로 율법의 교훈으로 인간의 능력을 가늠하는 것은 어처구니없는 짓이다.

그것은 마치 하나님께서 우리가 무엇을 얼마나 많이 할 수 있는지를 고려해서 우리에게 마땅히 행해야 할 바를 요구하신 것처럼 오해하는 것이다.

연약하여

어느 누구도 바울이 공연히 율법을 연약하다고 비난한다고 생각하거나 율법을 의식(儀式)에 대한 준수로 한정시켜서 이해하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 그는 율법의 약점이 율법 자체에 어떤 흠이 있어서가 아니라 우리 육신의 부패함 때문임을 분명하게 밝힌다.

만일 어떤 사람이 하나님의 법을 완전히 이행한다면, 그 사람은 하나님 앞에서 의로운 자로 인정될 것이라는 점은 분명 의심의 여지가 없다. 그러므로 바울은 교훈에 관한 한 율법이 우리를 의롭다 하기에 충분하다는 점을 부인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율법에는 의에 대한 완벽한 규범이 들어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우리의 육신은 그 의에 이르지 못하기 때문에, 율법이 가지고 있는 온전한 능력이 시들해져서 소멸되어 버리는 것이다.

그러므로 바울이 의식(儀式)에서만 칭의의 능력을 제거하고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의 오류, 아니 좀더 정확히 말하면 착각은 이런 식으로 논박할 수 있다. 왜냐하면 바울은 율법의 연약함에 대한 책임을 우리 자신에게 분명하게 돌리고 있으며, 율법의 가르침에는 아무런 흠이 없다고 선언하기 때문이다.

나아가서 우리는 사도 바울이 통상적으로 ‘아스쎄네이아스’(astheneias, 연약함)라는 단어를 이해하는 방식에 따라, 단순히 조금 부족한 것이 아니라 완전히 무기력한 것을 의미하는 것으로 율법의 ‘연약함’을 이해해야 한다.

그는 율법이 의롭다 함을 얻게 할 아무런 능력도 없다는 것을 나타내기 위해서 이 의미를 채택한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가 그리스도의 의에서 완전히 제외된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이는 우리 안에 아무런 의가 있을 수 없기 때문이다.

우리는 특별히 이 사실을 알아야 할 필요가 있다. 왜냐하면 우리가 우리 자신에게는 아무런 의가 없다는 사실을 먼저 분명하게 알지 못한다면, 결코 그리스도의 의로 옷 입을 수 없기 때문이다.

‘육신’이라는 단어는 항상 우리 자신과 동일한 의미로 사용된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법은 우리 본성의 부패 때문에 우리에게 아무런 소용이 없게 되는 것이다. 하나님의 법이 우리에게 생명의 길을 보여주는 것은 사실이지만, 그것이 사망으로 곤두박질하는 우리를 돌아오게 하지는 못한다.

하나님은 … 자기 아들을 … 보내어

이제 그는 하늘에 계신 아버지 하나님께서 자신의 아들로 말미암아 우리에게 의를 회복시키신 방식을 보여준다. 하나님께서는 그리스도의 바로 그 육신에 죄가 있는 것으로 규정하셨다.

즉, 그리스도께서는 죄상(罪狀)을 지워버림으로써 하나님 앞에서 우리를 얽어매고 있던 죄에 대한 책임을 폐하셨던 것이다.

하나님께서 그리스도의 육신에 죄를 정하심으로 말미암아 우리는 의롭게 되었다. 왜냐하면 죄에 대한 책임이 제거됨으로써 우리는 사면을 받게 되고, 결과적으로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의롭다고 여기시기 때문이다.

그러나 우리 안에 의가 결코 존재하지 않는다는 점을 우리에게 상기시키기 위해서, 바울은 먼저 그리스도께서 ‘보냄’을 받았다고 진술한다. 왜냐하면 그 의는 그분에게서 찾아야 하기 때문이다.

인간이 자기 자신의 공로를 의지하는 것은 무익한 일이다. 이는 하나님께서 기뻐해 주셔야만 혹은 그리스도께서 자신의 육신에 이루신 속죄로부터 의를 빌릴 때만 그들이 의롭기 때문이다. 그는 그리스도께서 ‘죄 있는 육신의 모양으로’ 오셨다고 말한다.

그리스도의 육신은 그 어떤 얼룩으로도 더럽혀지지 않았지만, 죄 있는 모양을 하고 있었다. 왜냐하면 그분의 육신은 우리의 죄로 인해 형벌을 당했기 때문이다. 또한 그리스도의 육신이 사망의 지배에 복종하기라도 한 것처럼, 사망은 분명 그 모든 권세를 그분의 육신에 행사했을 것이기 때문이다.

우리의 대제사장께서는 약한 자를 돕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그분 자신의 경험을 통해 배우셔야 했기 때문에, 그리스도는 죄 있는 육신의 모양으로 오심으로써 우리의 연약함을 기꺼이 경험하셨다. 우리의 연약함을 더 깊이 동정하시기 위해서이다.

이런 점에서 그분 안에는 우리의 죄된 본성과 비슷한 어떤 것imago이 나타났던 것이다.

곧 죄로 말미암아

내가 이미 언급한 대로, 어떤 사람들은 이 어구가 하나님께서 자신의 아들을 보내신 이유 혹은 목적이라고 설명한다. 즉, 하나님께서 죄의 요구를 만족시키기 위해서 아들을 보내셨다는 것이다. 크리소스톰과 그를 추종하는 많은 사람들은 이 어구를 약간 더 조잡한 의미로 이해한다.

즉, 죄가 죄 때문에de peccato 정죄를 당했다는 것이다. 다른 말로 하면, 죄가 그리스도께서 마땅히 받으셔야 하는 처우와는 정반대로, 그리고 부당하게 그분을 공격했기 때문에 정죄를 당했다는 것이다.

나는 하나님께서 그리스도를 보내심으로써 우리의 구속(救贖)을 위한 값이 치러졌다는 것을 인정한다. 왜냐하면 의롭고 순전한 분이 죄인들을 대신해서 형벌을 담당하셨기 때문이다.

그러나 나는 ‘죄’라는 단어가 여기서 속죄를 위한 희생제물이라는 의미 외에 다른 의미로 사용되었다고는 생각할 수가 없다. 헬라어에서 저주가 내려진 희생제물을 ‘카싸르마’katharma라고 부르는 것처럼, 히브리어에서는 이것을 ‘아샴’asham이라고 한다.

바울은 고린도후서 5장 21절에서 ‘죄’라는 단어를 바로 이런 의미로 사용한다.

“하나님이 죄를 알지도 못하신 이를 우리를 대신하여 죄로 삼으신 것은 우리로 하여금 그 안에서 하나님의 의가 되게 하려 하심이라.” ‘말미암아’로 번역된 전치사 ‘페리’peri는 여기서 원인을 나타내는 것으로 이해된다. 그는 마치 다음과 같이 말하는 것 같다. “그 희생제물 때문에 혹은 그리스도께 지워진 죄의 짐 때문에, 죄는 그 능력을 잃어버렸다. 이는 죄가 우리를 그 지배 아래 붙잡아 두지 못하게 하기 위함이다.”

송사(訟事)에서 패한 사람들처럼 죄가 그리스도의 육신에 ‘정해졌다’고, 그는 은유적으로 말한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는 그리스도의 희생제물을 통해서 죄 사함을 얻은 사람들을 더 이상 죄 있는 자들로 여기지 않으시기 때문이다.

우리를 압제하던 죄의 왕국이 멸망당했다고 말해도 그 의미는 동일할 것이다. 이런 식으로 그리스도께서는 자신의 것을 우리에게 전가시켜주시기 위해서 우리의 것을 취하셨다. 왜냐하면 그분은 우리의 저주를 친히 맡으시고 우리에게 그분의 복을 주셨기 때문이다.

여기서 바울은 ‘육신에’라는 말을 덧붙인다. 이는 죄가 바로 우리의 본성 속에서 정복당하고 폐해졌음을 알게 됨으로써 우리가 좀더 분명한 확신을 가질 수 있도록 하기 위함이다. 그러므로 우리의 본성은 진정으로 그분의 승리에 참여하게 된다는 결론이 내려진다. 이것은 바울이 곧 선언하는 바이기도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