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의 성령의 법이 죄와 사망의 법에서 너를 해방하였음이라 롬 8:2
이것은 앞 문장에 대한 증거이다. 이 어구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거기에 사용된 단어들의 의미를 주목해야 한다. 바울이 하나님의 성령을 ‘성령의 법’이라고 부른 것은 적절하지 않다.
이 성령은 우리의 영혼에 그리스도의 피를 뿌림으로써, 우리의 죄책과 관련된 죄의 얼룩을 우리에게서 씻어줄 뿐만 아니라 우리를 성화시켜서 참으로 정결하게 한다.
그는 이 성령이 생명을 준다고 덧붙이는데, 히브리 어법에 따르면 소유격(‘생명의’)은 형용사(‘생명을 주는’)로 이해해야 한다. 여기서 인간을 율법의 조문에 묶어두는 사람들은 그를 사망의 지배 아래 있게 하는 것이라는 결론이 나온다.
다른 한편으로 바울은 육신의 지배와 거기서부터 나오는 사망의 폭정을 ‘죄와 사망의 법’이라고 부른다. 이를테면 하나님의 법이 생명의 성령의 법과 죄와 사망의 법 사이에 놓이게 되는 셈이다.
하나님의 법은 의를 가르쳐주기는 하지만 의를 주지는 못한다. 오히려 그것은 죄의 종이 되도록 우리를 얽어매며, 좀더 강한 끈으로 사망의 종이 되도록 우리를 속박한다.
그러므로 이 문장의 의미는 다음과 같다.
“하나님의 법은 인간을 정죄한다. 왜냐하면 인간이 율법에 대한 의무를 지고 있는 이상, 그들은 죄의 속박으로 말미암아 눌림을 당하고 결과적으로 사망의 위험에 처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리스도의 성령은 육신의 터무니없는 욕망을 바로잡음으로써 우리 안에 있는 죄의 법을 폐하시며, 동시에 우리를 사망의 위험에서 건지신다.”
혹자는 그렇게 되면 우리의 범법(犯法)을 가려주는 용서가 우리의 중생에 달려 있는 것이 아니냐면서 이의를 제기할지도 모른다. 거기에 대해서는 쉽게 답할 수 있다.
바울은 여기서 우리가 죄에서 건짐을 받는 이유를 제시하는 것이 아니라 단지 그 방법을 상술하고 있을 뿐이다. 그는 우리가 율법의 외적인 가르침에 의해 죄에서 건짐을 받는다고는 말하지 않는다.
그러나 하나님의 성령이 우리를 새롭게 하실 때 우리는 또한 값없는 용서로 말미암아 의롭다 함을 얻게 됨으로써 더 이상 죄의 저주 아래 있지 않게 된다는 것을 넌지시 비춘다. 그러므로 이 문장에서 바울은 중생의 은혜가 의(義)의 전가와 결코 분리되지 않는다는 의미로 말한 것과 마찬가지이다.
나는 일부 해석자들이 그러는 것처럼 ‘죄와 사망의 법’이 하나님의 법을 의미한다고 받아들일 용기는 없다. 그러한 표현은 너무 심한 것 같다. 물론 율법이 죄를 더함으로써 사망을 낳을 수도 있지만, 앞에서 바울은 비위에 거슬리는 이 표현의 사용을 일부러 자제했다.
또한 어떤 사람들은 바울 자신이 육신의 욕정을 정복했다고 말하기라도 한 것처럼 이해해서 ‘죄의 법’이 육신의 욕정을 의미하는 것으로 설명하는데, 나는 그들의 의견에도 동의하지 않는다.
바울은 우리에게 하나님과의 고요한 화평을 가져다주는 ‘공들이지 않고 얻는 사죄(赦罪’)에 대해서 이야기하고 있다. 이러한 사실은 이후 진술에서 아주 분명해질 것 같다.
나는 여기에 나오는 ‘법’이라는 말을 에라스무스가 한 것처럼 ‘권리’ 혹은 ‘권세’라고 풀이하기보다는 그 말 그대로 사용하고 싶다. 왜냐하면 바울이 깊이 생각하지 않고서 하나님의 법을 언급하지는 않았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