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 내 속사람으로는 하나님의 법을 즐거워하되 23 내 지체 속에서 한 다른 한 법이 내 마음의 법과 싸워 내 지체 속에 있는 죄의 법으로 나를 사로잡는 것을 보는도다 롬 7:22-23
그러므로 여기서 우리는 경건한 사람들 안에서 일어나는 분열의 특성을 보게 된다. 그 분열 때문에, 어거스틴이 어딘가에서 ‘그리스도인의 전투’the Christian struggle라고 부른 영육간의 전투가 발생하는 것이다.
하나님의 법은 인간에게 의의 규범을 따르기를 요구하고, 사탄의 포악한 법인 불법은 그에게서 사악함을 유발시킨다. 영은 인간을 하나님의 법에 순종하도록 이끌고, 육신은 반대 방향으로 그를 잡아끈다.
이렇듯 그는 상반되는 욕망으로 말미암아 괴롭힘을 당하기 때문에, 이제 이중적인 존재가 된다. 그러나 분명 그의 영이 주권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그는 특별히 영을 기준 삼아 자신을 판단하고 평가한다.
바울은 자기 육신에 사로잡혀 있다고 말하는데, 이는 그가 여전히 악한 욕망에 미혹을 당하고 자극을 받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서, 그 안에 있는 악한 욕망이 그것과 전적으로 반대되는 영적 욕구를 억압하고 있다.
우리는 ‘속사람’이라는 말과 ‘지체’라는 말의 의미를 깊이 주목해야 한다. 많은 사람들이 이 표현을 잘못 이해함으로써 오류에 빠졌다. ‘속사람’이라는 말은 단순히 영혼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중생하게 하신 영혼의 신령한 부분을 가리키는 것이다. 그리고 ‘지체’는 영혼의 남아 있는 다른 부분을 의미한다.
영혼은 인간의 우월한 부분이고 몸은 인간의 열등한 부분이다. 그러므로 영은 육신보다 우위에 있다. 영은 인간 안에서 영혼의 위치를 차지하지만, 부패하고 오염된 영혼인 육신은 몸의 위치를 차지한다. 이런 이유 때문에 영은 ‘속사람’이라고 부르고 육신은 ‘지체’라고 부르는 것이다.
고린도후서 4장 16절에서는 속사람이 다른 의미로 이해되지만, 본문의 문맥에서는 내가 제시한 해석대로 해야 맞다. 영을 속사람이라고 부르는 이유는 그것이 가진 탁월함을 나타내기 위함이다.
즉, 육신의 본능적 요구는 인간의 겉에서 맴돌지만 영은 마음과 감춰진 감정들을 소유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것은 마치 땅을 하늘에 비교하는 것과 같다. 왜냐하면 바울이 인간 안에 명백하게 존재하는 모든 것을 경멸적으로 표현하기 위해서 ‘지체’라는 말을 쓰고 있기 때문이다.
이는 믿음으로 깨닫는 경우를 제외하고는, 은밀하게 진행되는 우리 영혼의 회복을 우리의 감각으로는 감지할 수 없다는 사실을 좀더 분명하게 밝히기 위함이다.
‘마음의 법’이 바르게 질서 잡힌 감정을 의미한다는 것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 그러므로 이 어구를 그 문맥과는 별개로 아직 중생하지 않은 사람들에게 적용하는 것은 잘못된 것임이 분명하다.
왜냐하면 중생하지 않은 사람들의 영혼은 이성을 상실했기 때문에(anima a ratione degenerat) 분별력이 없다고, 바울이 우리에게 가르쳐주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