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빈주석 로마서
7장

로마서 7장 15절 칼빈 주석

내가 행하는 것을 내가 알지 못하노니 곧 내가 원하는 것은 행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미워하는 것을 행함이라 롬 7:15

내가 행하는 것을 내가 알지 못하노니

이제 그는 이미 중생한 사람에 대한 좀더 구체적인 실례를 든다. 이 사람 안에는 그가 염두에 두고 있는 두 가지 사실이 좀더 분명하게 나타난다. 그것은 하나님의 법과 인간의 본성 사이에 엄청난 차이가 존재한다는 점과 죄 자체가 사망을 낳을 수는 없다는 점이다.

세상적인 인간은 죄를 짓고자 하는 강한 욕망 속으로 총력을 기울여 돌진하기 때문에, 자유로운 선택에 의해서 죄를 짓는 것처럼 보인다. 마치 그가 스스로를 통제할 수 있는 힘을 가지고 있기라도 한 것과 같다.

그 결과, 다음과 같은 더할 나위 없이 유해한 견해가 거의 모든 사람들 사이에 널리 퍼지게 되었다. 즉, 자신이 가진 선천적인 능력으로 말미암아 인간은 하나님의 은혜의 도움 없이도 자기가 기뻐하는 길을 택할 수 있다.

그러나 하나님의 영으로 말미암아 신자의 의지가 선(善)으로 이끌림을 받는다 할지라도, 본성의 부패함은 그 사람 안에서 눈에 띄게 나타난다. 왜냐하면 본성의 부패함은 그것과 반대되는 것에 완강하게 저항하며 싸우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중생한 사람의 경우는 우리의 본성과 율법의 의 사이에 존재하는 불일치가 얼마나 큰지를 알려주는 가장 적합한 예를 제공하는 것이다.

또한 우리는 단순히 인간의 본성을 살펴보는 것보다 이 중생한 사람의 예를 통해서, 율법과 사망의 관계를 다루는 앞 절 말씀에 대한 좀더 적합한 증거를 찾을 수 있을 것이다.

율법은 완전히 육신에 속한 사람 안에서 사망을 낳을 뿐이다. 그래서 율법은 이 점에 관해서 아주 쉽게 비난을 받는다.

이는 악의 근원이 어디인지 불분명하기 때문이다. 반면에 율법은 중생한 사람 안에서 유익한 열매를 맺는다. 이 사실은 율법으로 하여금 생명을 주지 못하도록 방해하는 것은 육신뿐이라는 것을 입증해준다. 율법이 혼자서 사망을 낳는다는 것은 터무니없는 소리이다.

그러므로 사도 바울의 논증 전체를 좀더 분명하고 정확하게 이해하기 위해서는, 인간이 하나님의 영으로 말미암아 새롭게 되기 전에는 그가 언급한 이 갈등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점을 주목해야 한다.

자기 멋대로 하도록 내버려두면 인간은 아무런 저항 없이 자기의 정욕이 이끄는 대로 완전히 사로잡히게 된다. 경건하지 않은 자들이 양심의 가책 때문에 고통을 당하기도 하고, 악을 행하는 기쁨을 누릴 때는 반드시 쓰라린 맛도 조금은 보게 된다는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이것을 근거로 경건하지 않은 자들이 악을 미워하고 선을 좋아한다는 결론을 추론할 수는 없다. 이렇듯 주님께서 그들이 그러한 고통을 감당하도록 허용하시는 것은 그들에게 의에 대한 사랑이나 죄에 대한 증오를 불어넣기 위함이 아니라, 어떻게 해서든 그들 앞에서 그분의 심판을 드러내기 위함이다.

그러므로 경건하지 않은 자들과 신자들 간에는 다음과 같은 차이점이 있다. 경건하지 않은 자들은 양심의 판단을 통해서 자기의 죄를 깨닫게 될 때, 그것을 정죄하지 않고 지나칠 만큼 마음의 눈이 멀거나 완악해지는 경우는 결코 없다.

왜냐하면 그들 안에 있는 분별력이 완전히 소멸되지는 않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서, 그들은 옳고 그름의 차이를 여전히 기억한다.

또한 그들은 가끔 자기의 죄를 의식하고 공포에 사로잡혀서, 이 세상에서까지 일종의 정죄를 당하기도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온 마음으로 죄를 허용한다.

결국 그들은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진정한 혐오감 같은 것이 전혀 없는 상태로 죄에 굴복하는 것이다. 왜냐하면 그들을 괴롭게 하는 양심의 가책은 의지와 상반되는 감정에서 비롯되는 것이 아니라 심판을 부인하는 데서 나오는 것이기 때문이다.

반면 경건한 자들의 경우, 하나님의 중생의 역사가 그들 안에서 시작되기는 했지만 그들의 마음은 너무도 많이 나뉘어 있다. 그래서 그들은 마음에 특별한 소망을 품고 하나님을 열망하고 하늘에 속한 의(義)를 추구하며 죄를 미워하기는 하지만, 육신의 잔재로 말미암아 다시 세상에 이끌리게 된다.

따라서 그들은 이 분열된 상태 속에서 자신의 본성과 싸우게 되고, 그 본성과 자신이 대립하는 것을 경험한다. 그들이 스스로 정죄하는 것은 이성의 판단 때문에 어쩔 수 없어서 그런 것이기도 하지만, 참 마음으로 자기의 죄를 혐오하고 죄를 범하는 자기의 행동을 몹시 싫어하기 때문이기도 하다. 이것이 그리스도인들이 경험하는 영육간의 전투이다. 바울은 갈라디아서 5장 17절에서 이 전투에 대해서 언급한다.

그러므로 육신에 속한 사람이 자기 영혼의 전적인 승인과 동의를 얻어 죄 속으로 뛰어들지만, 주님께서 그를 부르시고 성령께서 그를 새롭게 하시면 곧바로 그는 분열을 경험하기 시작한다는 것은 맞는 말이다. 현세에서의 중생은 시작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그에게 남아 있는 육신의 잔재는 항상 부패한 성향을 따르며, 그렇기 때문에 성령과의 전투가 발생한다.

사도 바울이 다루고 있는 주제나 그가 추구하는 계획을 염두에 두지 않는 미숙한 자들은 그가 여기서 인간 본성에 대해서 다루고 있다고 생각한다. 철학자들이 우리에게 인간 본성에 대해 이와 비슷한 설명을 해주는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성경의 철학은 그보다 훨씬 더 심오하다. 왜냐하면 아담이 하나님의 형상을 잃어버린 이래로 인간의 마음에는 오직 부패함만 남아 있다는 것을 성경은 간파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궤변가들이 자유의지를 정의(定義)하거나 인간 본성이 가진 역량을 가늠하고자 할 때 이 구절을 붙잡는 것이다. 그러나 내가 이미 진술한 것처럼, 여기서 바울은 있는 그대로의 인간 본성에 대해서 설명하는 것이 아니라 신자들이 어떤 연약함을 가졌는지, 그리고 그 연약함의 정도가 어떠한지를 자신의 예를 들어 기술하는 것이다.

한동안 어거스틴도 이 구절을 해석하는 면에서 다른 사람들과 동일한 오류에 빠진 적이 있다. 그러나 이 구절을 좀더 면밀히 살펴본 후에, 그는 자기의 잘못된 가르침을 철회했을 뿐만 아니라, 이 구절을 중생한 자들에 관한 것으로 이해할 수밖에 없음을 보니페이스(Boniface, 어거스틴 당시의 로마 호민관 중 한 사람)에게 보내는 첫 번째 책에서 설득력 있는 이유를 들어 입증했다. 이제 독자들은 어거스틴의 입증이 맞다는 것을 분명하게 알 수 있을 것이다.

그는 육신의 연약함 때문에 저지른 행위를 자신의 행위라고 인정하지 않는다는 의미로 “내가 알지 못하노니”라고 말한 것이다. 왜냐하면 그는 그 행위를 미워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에라스무스가 이 어구에 나오는 단어를 ‘시인하다’라고 번역한 것은 그런대로 괜찮다. 하지만 그렇게 번역할 경우 의미가 애매할 수도 있기 때문에, 나는 ‘알다’라는 단어를 그대로 사용하고자 한다.

율법의 교훈은 올바른 판단과 너무도 잘 들어맞기 때문에, 여기서 우리는 신자들이 율법을 어기는 것을 인간답지 못한 것으로 여기고 거부한다는 것을 추론할 수 있다. 그러나 바울은 자신이 율법이 규정하는 바와 다르게 가르친다는 점을 시인하는 것 같다.

그래서 많은 해석자들이 오해를 해서, 바울이 중생한 사람이 아닌 다른 사람을 염두에 두고 이 구절을 이야기한다고 잘못 생각했다. 여기서 흔한 오류가 발생하게 된다.

즉, 로마서 7장 전체가 중생하지 않은 사람의 본성에 대해서 설명한다고 주장하는 것이다. 그러나 바울이 ‘율법을 범하는 것’에 대해서 이야기할 때, 그는 경건한 자들이 범하는 모든 과실을 포함시킨다.

그렇다고 해서 그 과실 때문에 경건한 자들이 하나님을 경외하는 마음이나 올바르게 행하고자 하는 열심을 상실하는 것은 아니다. 그러므로 바울이 율법이 요구하는 바를 자기가 행하지 않는다고 말하는 것은 그가 율법을 완벽하게 지키지 않았기 때문이며, 율법을 지키기 위해 노력하는 면에서 다소 지쳤기 때문이다.

내가 원하는 것은 행하지 아니하고

바울이 줄곧 선을 행할 능력이 없었다는 뜻으로 이 구절을 이해해서는 안 된다. 단지 그는 자기가 어떤 의미로는 속박을 받고 있기 때문에 스스로 원하는 바를 하지 못하는 것에 대해, 즉 충분히 활발하게 선을 추구하지 못하는 것에 대해 불평하는 것뿐이다.

또한 그는 육신의 연약함 때문에 머뭇거려서 자기가 정말 실패하고 싶지 않은 부분에서 실패했다고 불만을 토로한다. 그러므로 경건한 자가 선을 행하고자 해도 그렇게 하지 못하는 것은 그 마음에 걸맞는 노력을 수반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리고 경건한 자가 원하지 않는 악을 행하는 것은 그 마음이 똑바로 서고 싶어도 넘어지거나 아니면 적어도 비틀거리기 때문이다. 여기서 ‘원하는’이라는 말과 ‘미워하는’이라는 말은 성령에 적용되어야 한다.

성령은 신자들에게서 첫 번째 자리를 차지해야 한다. 물론 육신도 그 나름의 의지를 가지고 있다. 그러나 ‘의지’라고 할 때 바울은 자기가 특별한 애착을 가지고 추구하는 것을 의미한다. 그 마음의 주요한 욕구를 방해하는 것을, 그는 자기 의지에 반하는 것이라고 이야기한다.

우리는 여기서 우리가 앞에서 진술한바, 즉 바울이 신자들에 대해서 이야기하고 있다는 사실을 추론할 수 있다. 신자들 안에는 성령의 은혜가 어느 정도 존재한다. 그 성령의 존재로 말미암아 그들의 건전한 마음과 율법의 의가 일치하는 것이다. 왜냐하면 육신은 죄를 미워하지 않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