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가 율법은 신령한 줄 알거니와 나는 육신에 속하여 죄 아래에 팔렸도다 롬 7:14
이제 바울은 율법과 인간의 본성을 좀더 면밀하게 대조하기 시작한다. 이는 사망으로 이끄는 사악함의 원천을 좀더 명료하게 이해하기 위함이다. 그래서 그는 중생한 사람의 예를 우리 앞에 제시한다.
중생한 사람의 영은 주님의 법에 기꺼이 순종하려 하지만, 그 안에 있는 육신의 잔재(殘在)는 주님의 법을 따르지 않는다. 그러나 우리가 말했던 것처럼, 바울은 우선 본성과 율법을 단순하게 비교하고 있다.
인간에 관련된 문제 중에서, 영(靈)과 육肉 사이에 존재하는 불일치보다 더 심각한 것은 없다(왜냐하면 율법은 신령하고 인간은 육신에 속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인간의 본성과 율법 사이에 무슨 일치가 있을 수 있겠는가? 이는 어둠과 빛 사이에 아무런 일치가 없는 것과 마찬가지이다.
나아가서 바울은 율법을 ‘신령하다’고 함으로써, 일부 해석자들이 설명하는 것처럼 율법이 마음의 내적인 감정을 요구한다는 뜻을 나타낼 뿐만 아니라, 율법이 ‘육신에 속한’이라는 말과 반대되는 의미를 가지고 있음을 대조시켜서 보여주기도 한다.
그 일부 해석자들은 ‘율법이 신령하다’는 것을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외적인 행위에 관한 한, 율법은 사람의 손발을 묶어둘 뿐만 아니라 마음의 감정도 중요하게 여기며 하나님에 대한 신실한 경외심을 요구하기도 한다.”
육과 영의 대조는 이 구절에서 분명하게 제시되고 있다. 육신이라는 말이 인간이 모태(母胎)에서 가지고 나온 모든 것을 내포한다는 것은 문맥상 의심할 여지가 없이 분명하며, 사실상 이미 어느 정도 밝혀졌다. ‘육신’은 이 세상에 태어난 인간이 본성적인 특성을 그대로 가지고 있는 동안 붙여지는 호칭이다.
왜냐하면 그들은 부패하기에, 좋은 평판을 얻을 만한 아무것도 가지고 있지 않을 뿐만 아니라 상스럽고 세상적인 것 외에는 그 어떤 것도 바라지 않기 때문이다.
반면 영은 하나님께서 자신의 형상을 따라 우리를 새롭게 빚으실 때 우리의 부패한 본성이 새로워지는 것을 가리킨다. 바울이 이런 식으로 말하는 이유는 우리 안에서 역사하는 새로움이 성령의 선물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율법의 교훈이 가지는 온전함이 여기서 인간의 부패한 본성과 대비되고 있는 것이다. 그 의미는 다음과 같다. “율법은 천상天上의 거룩한 의로움을 요구한다. 아무런 흠도 드러나지 않고 아무것도 부족하지 않은 결백한 의로움이다.
그러나 나는 그 의로움과 싸우는 것밖에 할 수 없는 육신에 속한 인간이다.” 예전에 많은 사람들이 오리겐의 해석을 찬성하기는 했지만, 그의 해석은 반박할 가치도 없다. 그에 따르면, 성경을 문자적인 의미로 이해해서는 안 되기 때문에 바울이 율법을 신령하다고 했다는 것이다.
도대체 이것이 지금 다루고 있는 주제와 무슨 관련이 있다는 말인가?
이 표현을 통해 바울은 죄가 본래 어떤 힘을 가지고 있는지를 보여준다. 인간은 원래부터 죄의 종에 불과하다. 소나 나귀처럼 주인이 돈으로 사서 마음대로 학대하는 그런 노예이다.
우리는 죄의 권세에 완전히 지배를 당하고 있어서, 우리의 모든 지성과 감성과 행동은 죄의 영향 아래 있다.
나는 인간이 강요를 당해서 죄를 짓는다는 개념을 언제든 배제한다. 왜냐하면 우리는 우리 자신의 자유의지로 죄를 짓기 때문이다. 자발적으로 짓는 것이 아니라면 그것은 죄가 아닐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죄에 너무도 빠져 있어서, 자진해서 죄를 짓는 것밖에 할 수가 없다. 우리 안에서 우리를 쥐고 흔드는 사악함이 우리로 하여금 죄를 짓도록 몰아댄다.
그러므로 이 비유는 사람들이 말하는 것처럼 죄가 우리를 강제적으로 속박한다는 의미가 아니라, 인간이 선천적으로 가지고 있는 굴레로 말미암아 우리가 자발적으로 죄에 순종한다는 의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