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에 율법을 깨닫지 못했을 때에는 내가 살았더니 계명이 이르매 죄는 살아나고 나는 죽었도다 롬 7:9
바울의 의도는 죄가 그에 대하여 혹은 그 안에서 죽었던 적이 있었음을 넌지시 비추는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그가 늘 율법 없이 지냈다는 의미로 이 어구를 이해해서는 안 된다. ‘내가 살았더니’라는 어구는 특별한 의미를 함축하고 있다.
그가 살았던 이유는 율법이 없었기 때문이다(우리말 성경에는 ‘율법을 깨닫지 못했을 때’라고 번역되어 있으나, 칼빈이 인용한 성경에는 ‘apart from the law’ 혹은 ‘without the law’라고 되어 있어서 ‘율법이 없었을 때’라고 번역할 수도 있다. 칼빈이 나중에 설명하겠지만 어떻게 번역하든 의미는 동일하다 - 역자 주).
즉, 그는 자신의 의에 대한 자신감으로 우쭐해 있었고 실제로는 죽어 있었으면서 자신이 살았다고 주장했는데, 그 이유는 율법의 부재(不在) 때문이다.
이 문장을 다음과 같이 진술하면 그 의미가 훨씬 명료해질 것이다. “일찍이 내게 율법이 없었을 때, 나는 살아 있었다.” 나는 이 어구가 강조 용법을 사용한 것이라고 말했다. 왜냐하면 그는 의로운 척함으로써 자기가 살아 있다고 주장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그 의미는 다음과 같다. “율법에 대한 지식 없이 죄를 지었을 때, 나는 내 죄를 볼 수 없었다. 내 죄는 잠에 빠진 듯 아주 잠잠한 상태로 있어서 거의 죽은 것처럼 보였다. 다른 한편 나는 스스로를 죄인이라고 여기지 않았기 때문에, 내가 생명을 가졌다고 생각하고 스스로에 대해 만족했다.”
죄가 죽는 것은 사람이 사는 것이다. 다시 말하거니와, 죄가 사는 것은 사람이 죽는 것이다.
문제는 “율법을 알지 못함으로써 혹은 (그 자신의 말대로) 율법의 부재로 인하여, 바울이 살았다고 주장했을 때가 언제인가?” 하는 것이다. 그가 어려서부터 율법의 가르침을 배워 왔다는 것은 분명하다. 그러나 그 가르침은 ‘율법 조문에서 나온 신학’으로서, 그것을 배우는 자들을 겸손하게 하지 못한다.
그가 다른 구절에서 말하는 것처럼, 율법 안에 있는 생명의 빛을 보지 못하도록 유대인들에게는 수건이 드리워져 있었다(고후 3:14). 바울의 경우도 마찬가지이다.
그리스도의 영이 없어서 그의 눈이 가려져 있는 한, 그는 외적인 의(義)의 가면으로 만족했던 것이다. 그러므로 율법이 그의 눈앞에 있기는 했지만 그 율법이 주님의 심판이 가지는 진지한 의미를 그에게 새겨주지 못했기 때문에, 그는 율법이 없었다고 언급하는 것이다.
이렇듯 위선자들의 눈은 수건으로 가려져 있어서, 탐내지 말라는 그 계명이 우리에게 얼마나 많은 것을 요구하는지 보지 못하게 한다.
한편 율법이 진정으로 이해되기 시작했을 때, 바울은 이제 율법이 ‘이르렀다’고 말한다. 이렇게 해서 율법은 죄를 죽음에서 ‘일으켰다.’
이는 율법이 바울의 마음 가장 깊은 부분에 넘쳐나는 부패함이 얼마나 엄청난지 그에게 보여주었기 때문이다. 동시에 율법은 그를 죽게 만들었다.
지금 바울이 사람을 들뜨게 만드는 자신감에 대해서 이야기하고 있다는 점을 항상 기억하자. 그 자신감은 위선자들이 자기들의 죄를 알아차리지 못하기 때문에 우쭐해 있을 때 그들이 의지하는 것을 의미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