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빈주석 로마서
6장

로마서 6장 14절 칼빈 주석

죄가 너희를 주장하지 못하리니 이는 너희가 법 아래에 있지 아니하고 은혜 아래에 있음이라 롬 6:14

죄가 너희를 주장하지 못하리니

거의 혹은 전혀 진리를 담고 있지 않은 듯한 해석들을 거듭 언급하고 논박하는 데 오랜 시간을 들일 필요는 없다. 그러나 다른 해석들보다 훨씬 더 높은 개연성을 가지고 있을 수 있는 해석이 하나 있다.

그것은 ‘법 아래’라는 말을 우리의 마음을 새롭게 하지 못하는 ‘율법의 조문에 지배를 받는’이라는 의미로 이해하는 한편, ‘은혜 아래’라는 말을 우리가 은혜의 성령으로 말미암아 부패한 욕망에서 자유하게 되는 것을 의미하는 것으로 이해하는 해석이다.

그러나 내가 이 해석을 전적으로 지지하는 것은 아니다. 만일 우리가 이 의미를 받아들인다면, 다음에 나오는 질문의 목적은 무엇이겠는가? “우리가 법 아래에 있지 아니하고 은혜 아래 있으니 죄를 지으리요”(15절).

바울은 우리가 율법의 엄격한 적용에서 자유하게 되는 것으로, 그래서 하나님께서 더 이상 공의의 높은 기준에 따라 우리를 다루시지 않는 것으로 이 어구를 이해했다. 만일 그런 의미로 이해하지 않았다면, 그는 결코 그런 질문을 던지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므로 여기서 그가 바로 그 주님의 법의 속박으로부터 어느 정도 자유롭게 되는 것을 가리키고자 했다는 점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 나는 논쟁을 벌이지 않고 내 견해를 간략하게 설명할 것이다.

내가 생각하기에, 우선 여기에는 신자들에게 위로가 될 만한 격려의 말이 제시되어 있는 것 같다. 이는 그들이 자기들 자신의 연약함을 의식해서 거룩함에 이르고자 하는 노력을 소홀히 하지 않도록 하기 위함이다.

그는 그들에게 의(義)에 순종하는 일에 총력을 기울이라고 권면한 바 있다. 그러나 그들은 육신의 잔재(殘在)를 지니고 다니기 때문에, 불확실함 가운데 행할 수밖에 없다.

그러므로 그들이 자기들의 연약함을 깨닫고 나서 의기소침해지고 낙담하는 일이 없도록 하기 위해서, 그는 격려가 될 만한 말을 함으로써 그들의 마음을 새롭게 하는 기회로 삼는다.

즉, 이제 그들의 행위는 율법의 엄격한 규범의 요구를 따르지 않는다는 것이다. 또한 하나님께서는 그들의 불순(不純)을 용서하시고 그들을 기꺼이 관대하게 받아주신다는 것이다.

율법의 멍에는 그것을 메는 사람들을 괴롭게 하고 심하게 압박할 수밖에 없다. 그러므로 신자들은 그리스도께로 피하여, 그분께 그들의 자유를 수호하는 분이 되어달라고 간청해야만 한다는 결론이 나온다.

왜냐하면 그리스도께서는 그런 분이시기 때문이다. 그리스도 자신은 율법의 요구에 전혀 빚진 것이 없는 분이시지만 친히 율법의 속박을 감수하셨다. 사도 바울의 말을 빌리자면, 이는 율법 아래에 있는 자들을 속량(贖良)하시기 위함이다(갈 4:5).

그러므로 ‘법 아래 있지 않다’는 것은 율법을 행할 능력이 없다고 해서 우리를 정죄하는 율법 조문이 사문(死文)이라는 뜻이다.

또한 우리에게 완전한 의를 요구하고 그 어떤 부분이라도 어기는 사람에게는 예외 없이 사망을 선고하는 율법에 우리가 더 이상 종속되어 있지 않다는 뜻이기도 하다. 이와 마찬가지로, ‘은혜’라는 단어도 구속(救贖)의 두 부분을 모두 가리키는 것으로 이해해야 한다.

즉,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의를 전가해주시는 수단으로 삼으신 ‘죄 용서’와 우리를 선한 행실로 새롭게 빚어가시는 성령님의 ‘성화’를 가리키는 것이다.

내 생각에 이 구절에서 반대를 나타내는 접사 ‘그러나’는 원인을 나타내는 것으로 봐서 “우리는 은혜 아래 있으므로, 법 아래 있지 않은 것이다”라는 의미로 이해해야 할 것 같다(우리말 성경에는 ‘그러나’라는 말이 따로 번역되어 있지 않고, 법 아래 있지 않은 것과 은혜 아래 있는 것이 병렬식으로 번역되어 있다 - 역자 주).

이제 이 구절의 의미가 아주 분명해진다. 우리가 여전히 우리 자신에게서 느끼는 불완전함 때문에 옳은 것을 행하려고 애쓰는 과정에서 지치는 일이 없도록 하기 위해서, 사도 바울은 우리를 위로하고자 하는 것이다.

죄의 쏘는 것이 아무리 많이 우리를 괴롭게 하더라도, 그것이 우리를 패배시킬 수는 없다. 왜냐하면 우리는 하나님의 영으로 말미암아 죄의 쏘는 것을 정복할 수 있기 때문이다.

또한 우리는 은혜 아래 있기 때문에, 율법의 엄격한 요구로부터 자유하다. 더욱이 우리가 여기서 이해해야 할 것은, 하나님의 은혜를 입지 못한 모든 사람들은 율법의 멍에에 묶여 있으며 율법의 정죄 아래 있다는 것을 사도 바울이 당연하게 생각했다는 점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다른 한편으로 다음과 같은 결론을 내릴 수 있다. 인간이 율법 아래 있는 한, 그들은 죄의 지배에 복종하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