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는 죽은 자가 죄에서 벗어나 의롭다 하심을 얻었음이라 롬6:7
이 논증은 죽음이 본래부터 가지고 있는 속성 혹은 효과에서 끌어낸 것이다. 만일 죽음이라는 것이 생명이 행하는 모든 것을 멸한다면, 죄에 대하여 죽은 우리는 죄가 그 생명을 유지하는 동안 행했던 모든 활동들을 그만두어야 한다.
‘의롭다 하심을 얻었다’는 말은 속박에서 자유하게 되었다는 혹은 다시 회복되었다는 의미이다. 판사의 선고로 말미암아 사면(赦免) 받은 죄수가 고발이라는 굴레에서 벗어나 자유로운 것처럼, 죽음은 우리를 이 육신의 생명으로부터 벗어나게 해줌으로써 그 모든 책임으로부터 우리를 자유하게 해준다.
인간들 사이에서는 죄에서 벗어나 의롭다 하심을 얻는 예를 찾아볼 수가 없다. 그렇다고 해서 이 진술을 무의미한 공론(空論)으로 간주할 이유는 없다. 또 우리가 육신을 완전히 십자가에 못 박은 사람들의 수에 포함되지 않았다는 것 때문에 낙담할 이유도 없다.
하나님의 이 사역은, 그분이 우리 안에서 이 일을 시작하시는 바로 그 날 모든 것이 완성되는 것은 아니다. 그 과정은 점차적으로 진행되면서 매일 조금씩 진보하는 가운데 완성 단계에 이르는 것이다. 우리는 바울의 가르침을 다음과 같은 식으로 요약할 수 있을 것 같다.
“만일 너희가 그리스도인이라면, 너희가 그리스도의 죽으심에 참여하고 있다는(communionis cum morte Christi) 표를 너희 안에서 보여야 마땅하다. 그 열매는 너희의 육신이 그 모든 욕망과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힌다는 것이다.
그러나 육신의 흔적이 여전히 너희 안에 존재하는 것을 알게 된다고 해서, 그분의 죽으심에 참여하는 것이 실제가 아니라고 가정하지 말라. 목표에 도달하기까지 너희는 그리스도의 죽으심에 참여하는 것을 계속적으로 부지런히 늘려가야 한다.”
신자의 육신이 계속적으로 죽음의 과정을 거친다는 것은 그들에게 좋은 일이다. 그리고 성령께서 육신이 장악했던 영역에 대한 지배권을 행사하신다는 것은 여간 큰 성취가 아니다.
바울 사도는 고린도후서 4장에서처럼 종종 그리스도의 죽으심에 다른 형태로 함께하는 것communicatio에 대해서 언급하는데, 그것은 십자가를 지는 것이다. 우리가 십자가를 진 후에는 영생에의 참여consortium가 이어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