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빈주석 로마서
6장

로마서 6장 5절 칼빈 주석

만일 우리가 그의 죽으심과 같은 모양으로 연합한 자가 되었으면 또한 그의 부활과 같은 모양으로 연합한 자도 되리라 롬6:5

만일 우리가 … 연합한 자도 되리라

바울은 좀더 쉬운 표현을 사용함으로써 자기가 앞에서 제시한 논증을 확증한다. 그가 제시하는 비교의 내용은 모든 모호함을 없애준다.

왜냐하면 우리가 접붙임을 받았다는 것은 우리가 그리스도의 모범을 따른다는 의미일 뿐만 아니라 우리로 하여금 그분과 함께 자라가도록 해주는 비밀스러운 연합(arcanam coniunctionem)을 뜻하기도 하기 때문이다.

이 비밀스러운 연합을 통해 그리스도께서는 그분의 영으로 우리를 소생시키시며 그분의 능력을 우리에게 전해주신다. 어떤 식물이 다른 나무에 접붙임을 받았을 때 그 나무와 살고 죽는 것을 같이하는 것처럼, 우리가 그리스도의 죽음에 참여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그분의 생명에도 참여해야 한다는 것은 마땅하고 합리적이다.

만일 우리가 그리스도의 죽으심과 같은 모양으로(in similitudinem) 접붙임을 받는다면, 그리고 그분의 죽으심이 그분의 부활과 분리할 수 없는 것이라면, 결과적으로 우리의 죽음은 우리의 부활로 이어질 것이다. 그러나 이 어구는 두 가지로 해석할 수 있다.

즉, 우리가 ‘그분의 죽으심과 같은 모양으로’ 그분께 접붙임을 받는다고 할 수도 있고 우리가 단순하게 ‘그분과 같은 모양으로’ 접붙임을 받는다고 할 수도 있다.

첫 번째 해석을 취한다면, 헬라어 여격(與格) 조사 ‘호모이오마티’(homoiomati)는 우리를 접붙이는 수단을 가리키는 것이 되어야 한다. 이렇게 읽는 것이 심오한 의미를 가지고 있다는 점을 부인하지는 않지만, 두 번째 의미가 표현의 단순성에 더 맞는 것 같기에 나는 그렇게 읽고 싶다.

그러나 두 해석 모두 결국 같은 의미이므로 차이가 거의 없는 셈이다. 크리소스톰은 바울이 ‘죽으심과 같은 모양’이라는 표현을 써서 의미하고자 한 바가 ‘죽으심’이라고 주장한다. 그가 성경 다른 곳에서 ‘사람들과 같이 되셨다’(빌 2:7)라는 표현을 써서 ‘사람이 되셨다’는 것을 의미한 것과 같다.

그러나 내가 볼 때 ‘죽으심과 같은 모양’이라는 표현에는 좀더 중요한 의미가 들어 있는 것 같다. ‘부활’을 가리키는 것 외에, 그 표현은 우리가 그리스도와 똑같은 모습으로 죽음을 맞이하지는 않지만 우리의 죽음과 그분의 죽음 사이에는 다음과 같은 유사점이 있다는 의미를 내포하는 것 같다.

즉, 그리스도께서 우리에게서 취하신 육신의 형상으로 그 안에서 죽으신 것처럼, 우리도 우리 자신 안에서 죽는 것이다. 이는 그분 안에서 살기 위해서이다.

그러므로 우리의 죽음은 그리스도의 죽으심과 같지는 않지만 비슷하다고 할 수 있다. 우리는 지금의 이 생명이 죽는 것과 우리의 영적 회복 사이의 유비(analogia)를 주목해야 한다.

연합한 자가 되었으면

이것은 굉장한 강세 어구로서, 사도 바울이 지금 우리를 권면하고 있다기보다는 우리가 그리스도로부터 어떤 유익을 얻는지 가르치고 있음을 분명하게 보여준다. 그는 우리가 주의를 기울이거나 열심을 내서 실행할 수 있는 어떤 의무를 우리에게 요구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손이 행하신 접붙임에 대해서 이야기한다.

접붙임에 대한 이 은유 혹은 비교를 모든 세부 사항에 억지로 적용시켜야 할 이유는 없다. 왜냐하면 식물을 나무에 접붙이는 것과 우리의 영적인 접붙임 사이의 차이점은 곧 분명해질 것이기 때문이다.

나무에 접붙임을 하는 경우, 접붙여진 식물은 뿌리로부터 영양분을 빨아들이지만 사람들이 먹는 열매를 맺을 때는 그 식물이 자체적으로 가지고 있는 본래의 특성을 그대로 나타낸다.

그러나 영적인 접붙임의 경우, 우리는 그리스도로부터 흘러나오는 활력과 생명의 자양분을 얻을 뿐만 아니라 우리 자신의 본성에서 그분의 성품으로 옮겨간다.

사도 바울은 그리스도의 죽으심과 그분의 부활의 효력을 아주 단순하게 지적하고자 했다. 전자는 우리의 육신을 죽이는 데서, 그리고 후자는 성령께서 주시는 더 나은 본성을 우리 안에 회복하는 데서 명백하게 드러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