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빈주석 로마서
6장

로마서 6장 4절 칼빈 주석

그러므로 우리가 그의 죽으심과 합하여 세례를 받음으로 그와 함께 장사되었나니 이는 아버지의 영광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심과 같이 우리로 또한 새 생명 가운데서 행하게 하려 함이라 롬 5:4

그러므로 우리가 … 그와 함께 장사되었나니

이제 그는 우리가 그리스도의 죽으심과 합하여 세례를 받는다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설명하기 시작한다. 물론 완전하게 그 의미를 밝히는 것은 아니다. 세례의 목적은 우리가 자신에 대해 죽음으로써 새로운 피조물이 되게 하는 것이다.

바울이 그리스도의 죽으심에 동참하는 것에서 그분의 생명을 공유하는 것으로 논증을 펴나간 것은 잘한 일이다. 이 두 가지는 서로 분리할 수 없게 연결되어 있기 때문에, 우리의 옛 사람은 그리스도의 죽으심으로 말미암아 멸망을 당하고 그 결과 그분의 부활하심이 우리의 의를 회복시켜서 우리를 새로운 피조물로 만드는 것이다.

그리스도께서는 생명을 위하여 우리에게 주어진 바 되셨다. 그러므로 더 나은 생명으로 다시 부활하기 위함이 아니라면 왜 우리가 그분과 함께 죽어야 하는가? 따라서 그리스도께서는 진정으로 우리를 생명으로 회복시키기 위하여 우리 안에 있는 썩어질 것을 죽게 하시는 것이다.

여기서 한 가지 주목해야 할 것이 있다. 사도 바울은 그리스도의 죽으심이 모든 그리스도인들이 따르기에 적합한 모범이라도 되는 것처럼, 우리에게 그분을 본받으라고 단순하게 권면하는 것이 아니라는 점이다. 그가 좀더 고상한 어떤 것을 염두에 두고 있었음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

지금 그는 나중에 권면의 근거로 사용할 하나의 교리를 제시하고 있다. 우리가 분명하게 보게 될 테지만, 그의 교리는 그리스도의 죽으심이 우리 육신의 부패를 멸하고 파하는 효력이 있으며 그분의 부활은 우리 안에 더 나은 본성을 회복하게 하는 효력이 있다는 것이다.

또한 우리는 세례를 통해서 이 은혜에 참여하게 된다는 것이다. 토대가 되는 이런 중요한 주장을 내놓았으므로, 바울이 그리스도인들에게 그들의 부르심에 합당한 방식으로 살고자 노력하라고 권면하는 것은 백번 옳은 일이 될 것이다.

여기서 이 은혜의 능력이 세례 받은 모든 사람들에게서 뚜렷하게 드러나는 것은 아니라고 주장하는 것은 적절하지 않다. 왜냐하면 바울은 신자들에게 이야기할 때 늘 그러는 것처럼, 외적인 표를 사용해서 실체와 그것의 효과를 연결시키고(substantiam et effectum externo signo coniungit) 있기 때문이다.

주님께서 눈에 보이는 상징으로 제시하시는 모든 것은 항상 신자들의 믿음으로 말미암아 확증되고 승인된다는 것을 우리는 안다. 간단히 말해서, 그는 올바른 세례를 받았을 때 그 세례의 진정한 특성이 무엇인지 우리에게 가르쳐주고 있다.

그래서 그는 그리스도와 합하여 세례 받은 모든 갈라디아 교인들은 그리스도로 옷 입은 것이라고 증거한다(갈 3:27).

주님께서 제정하신 의식들과 신자들의 믿음이 일치할 때는 언제나 이러한 표현들을 사용해야 한다. 왜냐하면 우리가 감사하지 않는 마음과 사악함으로 하나님이 베푸시는 은총의 역사를 방해할 경우를 제외하고는, 아무런 효력이 없는 공허한 상징(nuda et inania symbola)을 받는 일이 결코 없기 때문이다.

아버지의 영광으로 말미암아

이것은 아버지 하나님께서 스스로를 참으로 영광스럽게 선포하신, 다시 말해서 자신의 영광의 장엄함을 보여주신 ‘찬란한 능력으로 말미암아’라는 뜻이다.

이렇듯 성경에서는 그리스도의 부활에서 행사된 하나님의 능력을 종종 격조 높은 언어를 사용해서 진술하는데, 거기에는 그럴 만한 충분한 이유가 있다.

즉, 그 어느 것과도 비할 수 없는 하나님의 능력을 명확하게 언급함으로써, 육신의 이해를 훨씬 뛰어넘는 마지막 부활에 대한 우리의 믿음을 드높이고 그리스도의 부활에서 얻는 다른 은총들을 찬양하는 것은 매우 중요하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