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럴 수 없느니라 죄에 대하여 죽은 우리가 어찌 그 가운데 더 살리요 롬 6:2
일부 해석자들은 여기서 사도 바울이 말도 안 되는 그런 어리석은 견해에 대해 분개하며 그것을 비난하고자 했을 뿐이라고 주장한다. 그러나 다른 구절들을 보면, 그가 긴 논증을 펴는 중에도 이런 답을 자주 내놓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여기서도 곧 그는 은혜에 대한 자기의 교리를 비방하는 사람들의 오류를 아주 세심한 주의를 기울여가며 입증할 것이다. 그러나 우선 그는 분노에 찬 부정적인 표현을 사용함으로써 그 견해를 거부한다.
이는 그리스도의 은혜로 말미암아 우리의 악을 조장한다는 것은 최고의 모순임을 그의 독자들에게 경고하기 위해서이다. 그분의 의는 우리의 의를 회복하는 수단이다.
그는 이제 역으로 논증을 편다. 죄를 짓는 자는 죄에 대하여 사는 것이다. 우리는 그리스도의 은혜로 말미암아 죄에 대하여 죽은 자들이다. 그러므로 죄를 폐한 것이 죄에 힘을 실어준다고 주장하는 것은 당치 않다. 오히려 중생의 은혜가 아니고서는 신자들이 결코 하나님과 화목하게 되지 않는다는 것이 진리이다.
사실 우리는 나중에 정결한 삶으로 하나님을 예배하기 위해서, 바로 그 목적 때문에 의롭다 함을 얻는다. 그리스도께서는 자신의 피로 우리를 깨끗이 씻으시고, 자신의 속죄로 말미암아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자비를 베풀도록 하신다.
이 모든 일은 우리로 하여금 그분의 영에 참여하는 자가 되게 함으로써 가능하다. 그분의 영은 우리를 거룩한 삶으로 새롭게 하신다. 그러므로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에게 제시된 은혜로 말미암아 죄가 힘을 얻는다면, 그것은 하나님의 일하심을 가장 어처구니없게 뒤집는 처사가 될 것이다.
질병을 완전히 없애버리는 약이 그 질병을 촉진시키지는 않는다. 나아가서 우리는, 내가 이미 언급한 요점을 명심해야 한다. 즉, 바울은 여기서 하나님께서 우리를 그분의 아들과의 교제 가운데로 부르셨을 때 그분께 드러난 우리의 죄된 상태를 다루고 있는 것이 아니다.
그는 그분이 우리에게 자비를 베푸시고 우리를 값없이 자녀 삼아주셨을 때 우리가 마땅히 어떤 모습이어야 하는지를 이야기하고 있다. 미래를 의미하는 부사 ‘더’(any longer)를 사용함으로써 바울은 칭의 이후에 어떤 변화가 이어져야 하는지 보여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