율법이 들어온 것은 범죄를 더하게 하려 함이라 그러나 죄가 더한 곳에 은혜가 더욱 넘쳤나니 롬5;20
그는 율법이 공포되기 전에 죄가 존재했다고 앞에서 발언한 것을 염두에 두고 지금 이 내용을 진술하는 것이다. 그가 그런 발언을 했을 때, 곧바로 “그렇다면 율법이 주어진 목적이 무엇인가?”라는 질문이 나왔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그는 이 어려운 질문에 답할 필요가 있었다. 그러나 이 문제를 다루기 위해 본론에서 오랫동안 벗어날 수는 없었기 때문에, 그는 지금까지 그것을 고려하는 것을 미루었다.
이제 말이 나온 상황에서 그는 죄를 더하기 위해서 율법이 들어왔다고 밝힌다. 그는 여기서 율법의 전체적인 용도와 역할을 기술하는 것이 아니라, 다만 지금 다루고 있는 주제에 도움이 되는 한 부분만 다룰 뿐이다.
하나님의 은혜를 설명하기 위해서는 인간의 파멸이 그들 앞에 좀더 분명하게 드러나야 할 필요가 있었다고 그는 말한다. 율법이 주어지기 전에 인간은 참으로 파멸된 상태에 있었다. 그러나 그들이 그런 파멸 속에서도 살아남는 것 같았기에 그들을 더 깊숙한 곳으로 밀어넣은 것이다.
인간의 기대와는 달리 그들이 자기들을 매몰시켰던 홍수 속에서 나오게 되었을 때, 그들이 건짐 받은 사실이 훨씬 놀랄 만한 것이 되도록 하기 위해서이다. 율법이 주어진 부분적인 이유가 이미 한번 정죄를 당한 인간을 다시 정죄하기 위한 바로 그 목적 때문이라는 것은 생뚱맞은 이야기가 아니다.
어떤 수단을 동원해서든 인간이 유죄하다는 것을 증명함으로써 그들이 자기의 사악함을 깨달을 수 있도록, 아니 깨달을 수밖에 없도록 할 필요가 있기 때문이다.
어거스틴 시대 이래로 이 구절을 보통 어떤 식으로 해석했는지는 잘 알려져 있다. 율법의 제한 조항을 통해서 욕망이 저지당할 때, 그 욕망은 훨씬 더 자극이 되는 법이다. 금지된 것을 추구하는 것이 인간 안에 있는 자연스러운 경향이기 때문이다.
나는 이 어구에 나오는 ‘더하게 한다’는 말을 범죄에 대한 지식과 그것을 추구하는 집요함을 더하게 하는 것으로 단순하게 받아들인다. 왜냐하면 율법으로 말미암아 죄가 인간의 눈앞에 제시되고, 그로 말미암아 그들은 자기들을 위한 정죄가 쌓여 있음을 계속해서 볼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이렇게 해서 죄가 인간의 양심에 자리하게 된다. 율법이 없었더라면 인간이 죄에 대해서 마음을 쓰지 않았을 것이다. 율법이 주어졌기 때문에, 그리고 무자비하게 짓밟히던 하나님의 뜻이 알려졌기 때문에, 이전에 정의의 한계를 무턱대고 넘어갔던 자들은 이제 하나님의 권위를 멸시하는 셈이 된다.
여기서 율법으로 말미암아 죄가 더해진다는 결론이 나온다. 이제 율법을 주신 자의 권위가 멸시 당하고 그분의 위엄이 실추되는 일이 벌어지기 때문이다.
죄가 인류를 제압하여 그 지배 아래 둔 후에 인류를 돕기 위해, 은혜가 임하게 된다. 바울은 다음과 같은 이유 때문에 그 은혜의 풍성함이 더욱 놀랍게 드러났다고 우리에게 가르쳐준다. 즉, 죄가 창궐할 때 은혜가 넘치도록 쏟아부어져서 그 죄의 홍수를 압도할 뿐만 아니라 그것을 집어삼키기에 이르렀기 때문이다.
우리는 여기서 다음과 같은 사실을 배울 수 있다. 즉, 우리에 대한 정죄가 율법을 통해 우리 앞에 제시된 것은 우리로 하여금 계속 그 정죄 아래 있게 하기 위함이 아니라, 우리에게 자신의 비참함을 속속들이 알게 함으로써 우리를 그리스도께 인도하기 위함이라는 것이다.
그리스도께서는 병자에게는 의사로, 포로된 자에게는 해방자로, 마음이 괴로운 자에게는 위로자로, 그리고 억눌린 자에게는 옹호자로 보냄을 받으셨다(사 61: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