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빈주석 로마서
5장

로마서 5장 6절 칼빈 주석

우리가 아직 연약할 때에 기약대로 그리스도께서 경건하지 않은 자를 위하여 죽으셨도다 롬 5:6

그리스도께서 경건하지 않은 자를 위하여 죽으셨도다 목

나는 이 어구를 ‘우리가 연약했을 때에’라고 과감하게 풀이하지는 않았다. 물론 그 의미가 더 마음에 들기는 하다. 여기서 바울은 큰 것에서 작은 것으로 진행되는 논증 형식을 취하고 있으며, 나중에 좀더 충분하게 이 점에 대해 논의할 것이다.

그가 확실하고 짜임새 있게 이야기를 전개하지는 않지만, 그런 구조적인 문제 때문에 그 의미가 영향을 받는 것은 아니다.

그는 이렇게 말한다. “만일 그리스도께서 경건하지 않은 자들에게 자비를 베푸셨다면, 그리고 자신의 원수들을 아버지 하나님과 화목하게 하셨고 이 일을 자신의 죽음으로 이루셨다면, 그들이 의롭다 함을 얻을 때는 그들을 훨씬 더 쉽게 구원하지 않으시겠는가? 또한 자신이 은혜 가운데 들어가도록 회복시킨 자들을 자신의 은혜로 지키지 않으시겠는가? 특별히 그분의 생명의 효력이 그분의 죽음에 더해졌다.”

어떤 해석자들은 ‘연약할 때’가 그리스도께서 처음으로 이 세상에 나타나기 시작하셨을 때를 의미한다고 주장한다. 그리고 ‘아직 연약한’ 자들은 율법의 가르침 아래 있는 어린아이 같은 자들을 가리킨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나는 ‘아직 연약한’ 자들이라는 표현이 모든 그리스도인 신자들을 가리키며, ‘연약할 때’는 각각의 신자들이 하나님과 화목하게 되기 전의 기간을 가리킨다고 주장하는 바이다.

우리는 모두 진노의 자녀로 태어나서, 그리스도께 참여하는 자가 되기까지 계속 저주 아래 있게 된다. 그가 ‘연약한’ 자들이라는 표현을 쓴 것은 자기 자신 안에 죄밖에 없는 그런 사람들을 가리키고자 함이다. 왜냐하면 그는 바로 이어서 그들을 ‘경건하지 않은 자’라고 부르고 있기 때문이다.

연약함을 이런 의미로 이해하는 것은 전혀 이례적(異例的)인 것이 아니다. 고린도전서 12장 22절에서 그는 몸의 덜 귀한 지체들을 ‘약하다’고 부르고, 고린도후서 10장 10절에서는 자기 자신의 풍채가 전혀 기품이 없기 때문에 ‘약하다’고 말한다.

이런 의미는 앞으로도 빈번하게 등장할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연약할 때, 즉 우리가 전혀 아무런 가치도 없고 하나님 보시기에 온전하지도 못할 바로 그때에 그리스도께 경건하지 않은 자들을 위해서 죽으신 것이다.

믿음은 경건의 시작이다. 그리고 그리스도께서 위하여 죽으신 모든 사람들은 이 경건에서 멀어졌던 것이다. 이것은 그리스도의 죽음 이전에 의를 얻었던 구약의 조상들에게도 동일하게 해당되는 사실이다. 왜냐하면 그들은 장차 있을 그분의 죽으심으로부터 이 의를 얻었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