또한 그로 말미암아 우리가 믿음으로 서 있는 이 은혜에 들어감을 얻었으며 하나님의 영광을 바라고 즐거워하느니라 롬 5:2
이 은혜에 들어감을 얻었으니 우리가 하나님과 화목하게 되는 것은 그리스도께 달려 있다. 그분만이 하나님께 사랑받는 아들이며, 우리는 모두 본래 진노의 자녀이다.
그러나 이 화목하게 되는 은혜는 복음으로 말미암아 우리에게 전해진다. 왜냐하면 복음은 화목하게 하는 매개체이기 때문이다. 하나님과의 화목 덕분에 우리는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게 된다.
그러므로 우리로 하여금 행위에 대한 확신에서 좀더 수월하게 벗어나도록 하기 위해서, 바울이 그리스도 안에 있는 하나님의 은혜에 대한 확실한 보증을 우리 눈앞에 제시한 것은 옳은 일이다. 그는 ‘들어감을 얻는다’는 말을 통해 구원이 그리스도에게서 시작된다는 것을 우리에게 가르쳐준다.
또한 어리석은 자들이 생각하는 것처럼 어떤 준비를 함으로써 하나님의 자비를 기대할 수 있다는 가능성을 이런 식으로 배제시킨다. 그는 이렇게 말하는 것 같다. “그리스도께서는 아무런 자격이 없는 자들을 만나주시고, 그들의 구원을 위해 손을 내미신다.”
나중에 그는 우리의 구원이 견고하고 확실하게 남아 있는 것도 이 동일한 은혜가 지속됨으로써 가능하다고 곧바로 덧붙인다. 그가 이렇게 말하는 것은, 우리의 구원이 영원한 것은 우리 자신의 능력이나 부지런함에 근거한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께 토대를 둔 것이라는 뜻이다.
그러나 그는 동시에 ‘우리가 … 서 있는’이라는 표현을 쓴다. 이는 경건한 자들이 복음의 진리로 말미암아 강건해지고 육신에서 나온 모든 계획과 사탄의 모든 책략에 대항해서 견고하게 서기 위해서는 그들 마음 가운데 복음이 얼마나 깊이 뿌리 내려야 하는지를 가리키는 것이다.
‘서 있는’이라는 말을 사용함으로써, 그는 믿음이 하루만 있다가 덧없이 사라지는 확신에 불과한 것이 아니라 우리의 평생을 통해 지속될 만큼 우리 마음 가운데 깊숙이 새겨져 있는 것임을 의미한다.
그러므로 믿음으로 말미암아 믿는 자들의 무리에 들어온 사람은 갑작스러운 충동에 휩쓸려 믿게 된 사람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그를 위해 정해주신 자리에 지속적으로 견고하게 머물러 있으면서 그리스도께 붙어 있기를 결코 멈추지 않는 사람이다.
내세에 대한 소망이 존재하는 이유, 그리고 우리가 그 소망 안에서 담대하게 즐거워할 수 있는 이유는 우리가 하나님의 은혜라는 확고한 근거를 의지하기 때문이다.
바울이 이 구절에서 의미한 바는 이렇다. 신자들이 지금 이 땅에서는 나그네이지만, 그들에게 확신을 주는 근거로 말미암아 그들은 하늘에 오르게 되며 평안한 마음으로 장래의 기업을 그들 가슴에 품게 된다는 것이다.
이 구절은 궤변론자들이 주장하는 가장 골치 아픈 다음 두 가지 교리를 철저하게 무너뜨린다.
첫째, 그들은 그리스도인들에게 명하기를, 자기들을 향한 하나님의 은혜를 분별할 때 도덕적 추측으로 만족하라고 한다.
둘째, 그들은 우리의 구원이 마지막까지 영원할 것인지 어떤지에 대해 우리 모두는 불확실한 상태에 있다고 가르친다. 그러나 만일 현재에 대한 확실한 지식이 없다면, 그리고 미래에 대해서도 의심할 수 없는 분명한 확신이 없다면, 누가 감히 자랑하겠는가?
하나님의 영광에 대한 소망은 복음을 통해 우리에게 빛을 비추어주었다. 이 복음은 우리가 신성한 성품에 참여하는 자가 되리라고 증거한다(벧후 1:4). 왜냐하면 우리가 하나님의 얼굴을 맞대고 볼 때 우리가 그분과 같을 것이기 때문이다(요일 3: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