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브라함이 바랄 수 없는 중에 바라고 믿었으니 이는 네 후손이 이같으리라 하신 말씀대로 많은 민족의 조상이 되게 하려 하심이라 롬 4:18
우리가 이 번역을 채택한다면, 이 어구는 믿음을 가질 만한 충분한 이유가 전혀 없는 상황에서(사실 모든 이유들이 그에게 불리했다) 그가 계속해서 믿었다는 의미가 될 것이다. 보이는 것에 우리의 이해를 제한함으로써 소망의 본질을 보이는 것에서 찾으려 하는 것만큼 믿음에 방해가 되는 것은 없다.
‘바랄 수 없는 중에’라는 표현을 ‘바라는 것을 넘어서’라고 읽을 수도 있다. 그럴 경우에는, 믿음으로 말미암아 아브라함이 자기가 생각할 수 있는 모든 개념을 훨씬 더 넘어섰다고 바울이 말하는 것처럼 이해하는 것이다. 아마도 이렇게 풀이하는 것이 더 적절할 듯하다.
만일 육신이 느끼는 모든 감정을 멀리서 내려다 볼 수 있을 만큼 우리의 믿음이 하늘의 날개를 달고 날아오르지 않는다면, 그 믿음은 언제나 이 세상의 진흙에 꼼짝없이 빠져 있게 될 것이다. 바울은 ‘바라다’라는 말을 같은 문장에서 두 번 사용한다.
처음에 ‘바랄 수 없는 중에’라는 표현은 우리의 본성이나 육신의 이성에서 끌어낼 수 있는 ‘소망을 가질 만한 그럴듯한 증거’라는 뜻으로 사용된다. 그리고 ‘바라고’라는 두 번째 표현은 ‘하나님이 주신 믿음’을 가리킨다.
그러므로 이 어구의 의미는 다음과 같다. 소망의 근거가 전혀 없는 상황에서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약속에 대한 소망을 여전히 의지했으며, 주님께서 약속하셨다는 그 사실을 소망에 대한 충분한 근거로 여겼다. 물론 그 약속 자체는 믿기 어려울 만큼 터무니없이 보였다.
아브라함 당대에 이 어구를 적용하기 위해서 나는 이 번역을 택했다. 바울이 의미하는 바는, 아브라함을 비관하게 만드는 많은 유혹들이 있었을 때 그는 그것들에 넘어가지 않으려고 “네 후손이 하늘의 별과 같을 것이며 바다의 모래 같을 것이다”라는 자기에게 주어진 약속에 마음을 기울였다는 것이다.
바울은 우리로 하여금 성경을 읽도록 격려하기 위하여 일부러 그 인용구의 일부만 인용했다. 성경에서 말씀을 인용할 때마다 사도들은 우리를 자극해서 그 말씀을 좀더 주의 깊게 정독(精讀)하도록 하려고 언제나 주도면밀하게 신경을 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