율법은 진노를 이루게 하나니 율법이 없는 곳에는 범법도 없느니라 롬 4:15
이것은 앞의 구절에 대한 확증으로, 율법의 반대 효과에서 따온 것이다. 율법은 복수를 낳을 뿐이기에, 율법에서 은혜가 나온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율법이 선하고 온전한 인간에게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보여줄 것이라는 말은 사실이다.
그러나 율법은 죄 많은 부패한 인간에게 마땅히 행해야 할 의무를 제시하기 때문에, 그러면서 그렇게 할 수 있는 능력은 공급해주지 않기 때문에, 결국 율법은 하나님의 심판석 앞에서 인간을 죄 있는 존재로 드러내는 것이다.
우리의 본성은 너무도 부패해서, 무엇이 옳고 정당한지를 배우면 배울수록 우리의 죄악은 더 공공연하게 드러나고 특별히 우리의 완고함은 더 쉽게 간파된다. 그리하여 더 무거운 하나님의 심판을 초래하게 된다.
‘진노’라는 말은 성경 도처에서 나타나는 것처럼 하나님의 심판을 의미하는 것으로 이해해야 한다. 어떤 이들은 율법에 의해서 죄인의 분노가 격발된다고 주장한다. 이는 죄인이 율법을 주신 자를 자기의 욕정에 방해 되는 분으로 알고 그분을 미워하고 모독하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독창적인 발상이기는 하지만, 그들의 논증은 이 구절에 적절하지 않다. ‘진노’라는 단어가 사용되는 일반적인 경우를 볼 때, 그리고 바울이 이 어구를 곧바로 덧붙인 것을 볼 때, 그는 율법이 우리에게 초래하는 것은 정죄뿐이라는 아주 단순한 의미로 이 단어를 사용한 것이 분명하다.
이것 역시 그의 진술을 확증해주는 증거이다. 좀더 분명한 이유가 제시되지 않았다면,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진노가 어떻게 율법으로 말미암아 촉발되는지 알기 어려울 것이다. 그 이유는, 우리가 율법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의에 대한 지식을 가지게 될 때, 우리는 핑계 댈 것이 더 적어지고 결과적으로는 그분께 더 극악무도한 죄를 짓게 되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뜻을 알고도 그것을 경멸한 사람들은 그것을 모르는 상태에서 죄를 지은 사람들보다 더 무거운 형벌을 받아 마땅하다.
그러나 이 어구에서 바울은 어느 누구도 예외일 수 없는 ‘옳은 것을 단순히 위반하는 것’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것과 그렇지 않은 것이 무엇인지 아는 사람이, 하나님의 말씀이 정해놓은 경계를 의도적으로 자진해서 넘어가는 것을 ‘범법’이라는 말로 표현한다. 다른 말로 하면, 여기서의 범법은 단순히 죄를 짓는 행위가 아니라 옳은 것을 어기기로 의도적으로 작정한 완고함을 의미한다.
어떤 주석가들은 내가 부사로 이해한 불변화사 ‘후’(hu, ~곳에는)를 ‘~의’라는 뜻을 가진 관계사로 풀이해서 ‘율법이 없으면 그것의 범함도 없다’라는 식으로 해석한다. 그러나 전자가 더 적합하며 더 일반적으로 받아들여지는 번역이다. 어떤 쪽을 택하든 그 의미는 여전히 변함이 없다.
즉, 기록된 율법으로 말미암아 가르침을 받지 않은 사람은 하나님의 법을 의도적으로 깨트리고 범하는 사람만큼 그렇게 크게 범법하는 것은 아니라는 뜻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