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빈주석 로마서
4장

로마서 4장 16절 칼빈 주석

그러므로 상속자가 되는 그것이 은혜에 속하기 위하여 믿음으로 되나니 이는 그 약속을 그 모든 후손에게 굳게 하려 하심이라 율법에 속한 자에게뿐만 아니라 아브라함의 믿음에 속한 자에게도 그러하니 아브라함은 우리 모든 사람의 조상이라 롬 4:16

그러므로 상속자가 되는 그것이 … 믿음으로 되나니

이 논증의 마무리 부분은 다음과 같은 식으로 요약할 수 있다. “만일 우리가 행위로 말미암아 구원의 상속자가 된다면, 우리의 양자됨에 대한 믿음은 소멸될 것이고 양자됨에 대한 약속도 폐기될 것이다.

그러나 믿음과 약속 둘 다 확실해야 할 필요가 있다. 그러므로 우리는 믿음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자녀로 입양된다. 하나님의 선하심에만 근거해서 양자가 되는 것이기에, 이는 확실하게 보증된다.”

우리가 보는 것처럼, 사도 바울은 흔들리지 않는 확실성에 따라 믿음을 평가하며 주저함이나 의심은 불신앙으로 간주한다. 불신앙은 믿음을 폐하고 약속을 파기한다. 그러나 스콜라 학자들은 이 의심을 도덕적 추측이라고 부르면서, 그것으로 믿음을 대신한다.

그것이 은혜에 속하기 위하여

여기서 바울은 오직 순수한 은혜만이 믿음보다 앞선다는 점을 먼저 보여준다. 순수한 은혜는 믿음의 대상이다. 만일 은혜가 공로를 고려 요소로 삼는다면, 은혜를 얻은 것은 무엇이든 공들이지 않고 얻은 것이라는 바울의 주장은 틀리게 될 것이다.

이를 다른 말로 바꾸어서 다시 표현하자면 “우리가 믿음으로 말미암아 얻는 것이 은혜뿐이라면, 그렇다면 행위에 대해서는 더 이상 고려할 필요가 없는 것이다.” 다음에 이어지는 “이는 그 약속을 그 모든 후손에게 굳게 하려 하심이라”라는 어구는, 은혜에 의지할 때만 그 약속이 마침내 확실하게 보장된다는 것을 보여줌으로써 모든 모호함을 좀더 분명하게 제거한다.

바울의 이 표현은, 인간이 행위에 의존하는 한 그들은 불확실한 상태에 처하게 된다는 것을 확증해준다. 왜냐하면 그들이 행위에 의존한다는 것은 자기들에게 약속의 열매를 허용하지 않는다는 뜻이기 때문이다. 여기서 우리는 다음과 같은 사실을 또한 추론할 수 있을 것이다.

즉, 어떤 사람들이 생각하는 것처럼 은혜는 중생의 선물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공들이지 않고 받은 은총을 의미한다. 왜냐하면 중생은 결코 완벽하지 않기에, 그들의 양심을 충분히 만족시켜주지 못할 뿐만 아니라 그 약속을 자체적으로 승인하지도 못하기 때문이다.

율법에 속한 자에게뿐만 아니라

다른 곳에서는 ‘율법에 속한 자’라는 표현이 율법을 열렬히 지지하는 열심당원들에게 적용된다. 그들은 율법의 멍에에 스스로를 얽어매고 그것을 자신 있게 자랑하는 사람들이다. 그러나 여기서 이 어구는 그저 주님의 율법을 전해 받은 유대인들을 의미할 뿐이다.

다른 구절에서 바울은 율법의 지배 아래 여전히 묶여 있는 사람들이 모두 저주를 받는다고, 그러므로 그들이 은혜에 참여하지 못한다는 것 또한 확실하다고 우리에게 알려준다.

그러므로 여기서 그는 행위에서 난 의를 고집하며 그리스도를 저버린 율법의 종들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율법을 배우면서 자라서 그리스도를 따르는 자들이 된 사람들을 언급한다. 이 어구를 다음과 같이 표현하면 그 의미가 더 분명해질 것이다. “율법에 속한 자에게뿐만 아니라, 전에 율법을 받은 적이 없어도 아브라함의 믿음을 본받는 모든 사람들에게도 그러하니.”

우리 모든 사람의 조상이라

여기서 관계사 ‘who’는 원인을 나타내는 접사의 뜻을 가지고 있다(우리말 성경에서는 ‘아브라함은 우리 모든 사람의 조상이라’고 해서 관계사가 없는 것으로 번역되었으나, 칼빈이 인용한 성경에서는 ‘… Abraham, who is the father of us all’이라고 되어 있다 - 역자 주).

바울은 이방인들이 이 은혜에 참여한 자들이었다는 점을 보여주고 싶어 한다. 왜냐하면 아브라함과 그의 씨에게 기업을 얻게 한 그 동일한 예언으로 말미암아 이방인들도 그의 씨로 간주되었기 때문이다.

아브라함은 한 민족의 조상이 아니라 많은 민족의 조상으로 세움을 입었다고 진술되어 있다. 그 당시에 이스라엘에게만 한정되어 있던 은혜가 장래에는 확장될 것이라는 사실을 이 진술을 통해 미리 보여준 것이다. 왜냐하면 만일 그 약속된 복이 그들에게까지 확장되지 않는다면, 그들은 아브라함의 후손으로 간주될 수 없었을 것이기 때문이다.

성경의 흔한 용법에 따르면, ‘세웠다’라는 동사의 과거 시제는 하나님의 의도가 확실함을 나타낸다. 물론 그 당시에는 아브라함이 많은 민족의 조상이 되리라는 증거가 전혀 없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그렇게 선언하시므로, 아브라함이 많은 민족의 조상으로 세움을 입었다고 말하는 것은 정당하다. 모세의 이 진술을 괄호로 처리하면, 이 문장은 끊어지지 않고 다음과 같이 읽을 수 있게 된다.

“그가 믿은바 하나님 앞에서 우리 모든 사람의 조상이라”(우리말 성경에서는 ‘우리 모든 사람의 조상이라 그가 믿은바 … 하나님은’으로 되어 있으나 칼빈이 인용한 성경에서는 ‘Who is the father of us all before him whom he believed, even God’이라고 해서 약간 다른 의미로 되어 있다 - 역자 주).

유대인들이 자기들이 아브라함의 육적인 자손이라는 점을 지나치게 자랑하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는, 바울은 아브라함과 우리와의 관계가 어떤 모습인지 설명할 필요가 있었다.

그러므로 그는 아브라함이 ‘우리의 영적 조상’이라는 의미로 아브라함을 ‘하나님 앞에서 우리 모든 사람의 조상’이라고 말한 것이다. 이는 아브라함이 우리와의 육적인 관계로 말미암아서가 아니라 하나님의 약속으로 말미암아 모든 사람의 조상이 되는 특권을 가지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