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빈주석 로마서
4장

로마서 4장 11절 칼빈 주석

그가 할례의 표를 받은 것은 무할례시에 믿음으로 된 의를 인친 것이니 이는 무할례자로서 믿는 모든 자의 조상이 되어 그들도 의로 여기심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롬 4:11

그가 할례의 표를 받은 것은

바울은 할례가 의롭다 함을 주지는 않지만 그렇다고 해서 아무 유익이 없는 쓸모없는 것은 아니라는 사실을 밝힘으로써, 제기될 수도 있는 반론에 대해 미리 선수 친다. 그 근거는 할례가 아주 탁월한 용도를 가지고 있다는 것이다.

즉, 할례는 믿음에서 난 의를 인치는 일, 말하자면 그것을 승인하는 일을 한다. 바로 그 할례의 목적에 근거해서, 그는 할례가 이미 무할례시에 얻은 믿음에서 난 의를 확증하는 데 도움이 되기는 하지만 의의 원인은 아니라는 점을 시사하기도 한다. 그러므로 할례는 결코 믿음에서 난 의를 손상시키거나 없앨 수 없다.

이것은 성례(聖禮)의 일반적인 유익에 관한 주목할 만한 구절이다. 바울이 증언하듯이, 성례는 하나님의 약속을 우리 마음에 각인시켜주고 은혜를 확증시켜주는 봉인(封印)이다.

성례만으로는 아무런 쓸모가 없지만, 하나님께서는 그것을 그분의 은혜의 도구가 되도록 계획하셨다. 자신의 영의 비밀스러운 은혜로 말미암아 하나님께서는 성례라는 수단을 통해 택함 받은 자들의 유익을 도모하시는 것이다.

버림 받은 자들에게는 성례가 생명 없는 무익한 상징이지만, 그것이 가진 능력과 속성은 언제든 그대로 유지된다. 우리의 불신앙 때문에 성례의 효과가 우리에게서 사라질 수도 있다. 그러나 그것 때문에 하나님의 진리가 약해지거나 소멸되는 것은 아니다.

그러므로 ‘성례라는 거룩한 상징들은 하나님께서 우리의 마음에 그분의 은혜를 인치실 때 도구로 사용하시는 증거이다’라는 원칙은 여전히 변함이 없다.

여기서 특별히 명시(明示)해야 할 점은 할례의 표가 두 가지 은혜를 상징한다는 사실이다.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에게 복 있는 씨를 약속하셨고, 온 세상은 이 씨로부터 구원을 기대하도록 되어 있었다.

“내가 … 너와 네 후손의 하나님이 되리라”(창 17:7)라는 약속은 복 있는 씨에 대한 이 약속에 의존해 있었다. 그러므로 할례의 표에는 값없이 하나님과 화목하게 되는 은혜가 포함되어 있었다.

이런 이유 때문에 신자들은 약속된 씨를 기대할 필요가 있었다. 다른 한편, 하나님께서는 삶의 온전함과 거룩함을 요구하셨고 그런 삶을 얻을 수 있는 방법을 상징으로 보여주셨다. 즉, 인간의 본성 전체가 부패했기 때문에, 육신에서 난 모든 것을 사람에게서 잘라냄으로써 그런 삶을 얻을 수 있다고 보여주신 것이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에게 겉으로 드러나는 할례의 표로 말미암아 그 육신의 부패함을 영적으로 잘라내도록 지시하신 것이다. 모세도 신명기 10장 16절 말씀에서 이를 언급한다.

이것이 사람의 일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행하시는 일임을 보여주기 위해서, 하나님께서는 미숙한 갓난아이에게 할례를 행하라고 명하신다. 갓난아이들은 너무 어려서 그 명령을 행할 수 없기 때문이다.

신명기 30장 6절에서 보는 것처럼, 모세는 영적 할례를 하나님의 능력이 역사하는 것으로 분명하게 언급한다.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 마음과 네 자손의 마음에 할례를 베푸사.” 나중에 선지자들은 마음에 할례를 받는 것에 대한 이 개념을 훨씬 더 명료하게 설명한다.

결론적으로, 오늘날의 세례가 그러한 것처럼, 예전에 행해진 할례에도 새 생명과 죄의 용서를 증거하는 두 부분이 존재한다.

아브라함의 경우에는 의가 할례보다 선행되었지만, 우리가 이삭과 그 후손들에게서 보듯이 성례가 항상 그런 순서를 따르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구원이 겉으로 드러나는 표에 제한되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 하나님께서는 처음에 한 번 그런 실례를 보여주기 원하셨다.

믿는 모든 자의 조상이 되어

아브라함의 할례가 어떻게 값없는 의에 대한 우리의 믿음을 확증하는지 주목하라. 할례는 믿음에서 난 의를 인치는 것이다. 이는 믿는 우리에게도 의가 전가될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이다.

이런 식으로 바울은 그를 반대하는 자들이 제시할 수도 있을 법한 반론에 놀라운 솜씨로 대응한다. 만일 할례의 진리와 의미를 무할례에서 찾아야 한다면, 유대인들이 스스로를 이방인들보다 낫게 여기며 자랑할 만한 근거는 전혀 없다.

그러나 이런 의문이 있을 수 있다. “우리도 아브라함의 본을 따라 할례의 표를 받아서 그 동일한 의를 확증해야 하는 것은 아닌가? 만일 그렇다면 사도 바울은 왜 이것을 언급하지 않았는가?”

분명 그는 자기의 논증이 그 문제를 해결했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그 문제를 언급하지 않았을 것이다. 할례가 하나님의 은혜를 인치는 데만 도움이 된다는 사실을 인정했을 때, 오늘날 우리에게는 할례가 아무런 유익이 되지 않는다는 결론이 나온다.

왜냐하면 우리는 할례 대신 하나님께서 주신 표를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세례가 존재하는 오늘날에는 할례를 행할 필요가 전혀 없다. 그래서 바울은 이미 해결된 문제, 즉 이방인들이 왜 아브라함의 경우와 동일한 방식으로 믿음에서 난 의를 인침 받지 않아도 되는지에 대한 무익한 논증을 시작하려 하지 않는 것이다.

‘무할례시에’ 믿는다는 것은 이방인들이 자신들의 상태에 대해 만족하기 때문에 할례로 인침을 받지 않는다는 뜻이다. 여기서 전치사 ‘디아’(dia, ~로 말미암아)는 이렇게 ‘엔’(en, ~에)이라는 의미로 사용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