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빈주석 로마서
4장

로마서 4장 6절 칼빈 주석

일한 것이 없이 하나님께 의로 여기심을 받는 사람의 복에 대하여 다윗이 말한바 롬4:6

일한 것이 없이 하나님께 의로 여기심을 받는

이 어구를 통해서 우리는 ‘율법의 행위’를 의식에 한정시킨 사람들이 그저 괜한 트집을 잡고 있음을 알게 된다. 왜냐하면 그가 1절에서 율법의 행위라고 언급한 것을 지금은 어떤 수식어도 붙이지 않은 채 단순히 행위라고 부르기 때문이다(우리말 성경에서는 3장 20절에 나온 어구를 ‘율법의 행위’라고 번역하고 여기 4장 6절에 나온 단어는 ‘일’이라고 번역해서 서로 다른 말처럼 보이지만, 칼빈이 인용한 성경에서는 전자는 ‘works of the law’라고 하고 후자는 ‘works’라고 해서 동일한 단어로 되어 있다 - 역자 주). 아무런 수식어도 붙지 않은 단순한 이 표현이 모든 행위에 차별 없이 적용된다는 것은 누구나 동의할 것이다.

만일 그렇다면, 이러한 이해는 그가 펼치는 논증 전체에 걸쳐서 효력을 발휘해야 마땅하다. 오직 의식들에서만 칭의의 능력을 제거하는 것은 가장 이치에 맞지 않는 일이다.

왜냐하면 바울은 차별을 두지 않고 모든 행위에서 칭의의 능력을 배제하기 때문이다. 또한 하나님께서 사람들에게 그들의 죄를 돌리지 ‘않음으로써’ 그들을 의롭다 하신다는 부정否定의 표현이 담긴 문장이 여기에 덧붙여진다.

이런 표현을 통해 우리가 배우게 되는 사실은, 바울에게 의는 다름 아닌 죄의 사면赦免이며 이 사면 또한 공들이지 않고 그저 은혜로 얻는다는 점이다. 왜냐하면 사면이라는 말 자체가 가리키는 것처럼 의는 행위가 없는 상태에서 전가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빚이 면제된다는 것은 채무자가 채권자에게 빚을 갚을 때를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채권자가 전적으로 관용을 베풀어서 자발적으로 그 빚을 말소시킬 때를 말한다.

그러므로 배상賠償을 함으로써 우리 죄가 용서를 얻는다고 가르치는 사람들을 입도 뻥긋 못하게 만들어버리자. 바울은 의가 값없이 선물로 주어지는 것임을 입증하기 위하여 이런 사면의 개념을 빌려 자기의 논증을 펼치는데, 어떻게 그들이 그의 의견에 동의할 수 있겠는가? 그들은 우리의 죄가 용서 받기 위해서는 우리의 행위로 하나님의 공의를 만족시켜야 한다고 말한다.

그러나 바울은 여기서 믿음으로 난 의는 행위와 상관없이, 값없이 주어지는 것이라고 주장한다. 왜냐하면 믿음으로 난 의는 죄의 사면에 의존하기 때문이다. 죄의 사면에 어떤 행위가 요구된다면, 그의 논증은 분명 불합리한 것이 될 것이다.

다윗이 말한바

반쪽짜리 사면에 대한 중세 신학 교수들의 어처구니없는 주장도 다윗의 이 말로 똑같이 반박할 수 있다. 그들은 어리석게도, 우리의 허물이 용서되더라도 하나님께서는 여전히 형벌을 마음에 두고 계신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시편 기자는 우리의 죄가 가려졌다고, 즉 하나님 보는 데서 제거되었다고 선언할 뿐만 아니라, 그 죄가 우리에게 돌려지지 않는다고 덧붙인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돌리지 않으시는 그 죄들에 대해서 형벌을 요구하신다는 것이 어떻게 이치에 맞는다는 말인가?

그러므로 우리에게는 다음과 같은 영광에 빛나는 선언이 고스란히 남게 된다. “값없는 죄의 사면으로 말미암아 하나님 앞에서 결백하게 된 사람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롭다 함을 얻는다.”

여기서 또한 우리는 우리의 전 생애에 걸쳐 값없는 의가 끝나지 않고 지속된다는 사실을 추론할 수 있을 것이다. 계속되는 양심의 가책으로 오랫동안 시달린 다윗이 입을 열어 이 시편 말씀을 선언했을 때는 분명 자기 자신의 경험에서 나온 말을 한 것이기 때문이다.

이런 선언을 했을 당시, 그는 수년 동안 하나님을 경배해온 상태였다. 그러므로 믿음의 큰 진보를 이룬 후에 그가 경험을 통해 알게 된 사실은, 인간은 누구나 하나님의 법정에 소환될 때 비참한 상태에 있다는 것이다.

또한 그는 하나님께서 우리의 죄를 우리에게 돌리지 않음으로써 우리를 그분의 은총 가운데 받아주시는 것 외에는 우리가 복을 얻을 수 있는 방법이 전혀 없다고 선언한다. ‘믿음에서 난 의는 단지 시작일 뿐이고, 그 후에 신자들은 처음에 아무런 공로 없이 얻은 그 의를 행위로 말미암아 지속적으로 보유하게 된다’는 터무니없는 생각을 하는 사람들의 궤변도 이런 식으로 논박할 수 있다.

행위와 다른 복들이 의로 인정되는 경우가 종종 언급되지만, 그것 때문에 바울의 논증이 무효가 되는 것은 전혀 아니다. 시편 106편 30절에는 주님의 제사장인 비느하스가 간음한 자와 매춘한 자를 벌함으로써 이스라엘의 치욕거리를 없앴기 때문에 그것이 의로 여겨졌다고 기록되어 있다.

이 구절에서 우리는 한 사람이 옳은 행위를 했다는 내용을 전해 듣는다. 그리고 그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우리는 하나의 행위가 사람을 의롭게 하지는 않는다는 것을 안다.

“너희는 내 규례와 법도를 지키라 사람이 이를 행하면 그로 말미암아 살리라”(레 18:5)는 약속에 따르면, 율법의 모든 부분에서 완전하고 나무랄 데 없는 완벽한 순종이 요구된다.

그렇다면 비느하스가 행한 보복 행위가 어떻게 그에게 의로 인정되었는가? 무엇보다 그가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아 의롭다 함을 얻었다는 사실에는 의심의 여지가 없다.

왜냐하면 이미 그리스도의 의로 옷 입은 사람은 그들 자신뿐만 아니라 그들의 행위에서도 하나님의 은총을 입기 때문이다. 이런 행위들에 있는 얼룩과 흠은 심판을 받지 않도록 그리스도의 정결함으로 가리워진다. 어떤 더러운 것도 묻지 않은 행위만이 의로운 것으로 간주되기 때문에, 이러한 은총을 입지 않고서는 인간의 그 어떤 행위도 절대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없다는 사실은 아주 명백하다.

우리 행위가 의롭다고 여겨질 수 있는 유일한 이유는 믿음에서 난 의 때문이다. 그렇다면 행위가 의로 여겨졌다는 이유를 들어서 의가 믿음으로 말미암은 것만은 아니라고 주장하는 것은 얼마나 어리석은가?

그들의 주장에 대해 나는 논쟁의 여지가 전혀 없는 다음과 같은 답을 내놓는 바이다. “인간이 오직 믿음으로 말미암아서만 의롭다 함을 얻지 않는다면, 모든 행위는 불의한 것으로 정죄를 당해야 마땅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