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빈주석 로마서
4장

로마서 4장 3절 칼빈 주석

성경이 무엇을 말하느냐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믿으매 그것이 그에게 의로 여겨진 바 되었느니라 롬 4:3

성경이 무엇을 말하느냐

이것은 아브라함이 자랑할 근거를 가지고 있지 않다고 한 그의 소전제 혹은 가설假設에 대한 증거이다. 만일 아브라함이 하나님의 선하심을 믿음으로 받아들여서 의롭다 함을 얻었다면, 그는 자랑할 이유가 전혀 없다는 결론이 나온다.

왜냐하면 그는 다만 자기의 비참한 상태를 고백하고 그분의 자비를 구할 뿐, 자기 자신에게서 그 어떤 것도 들고 나오지 않았기 때문이다.

‘믿음에서 얻는 의’는 내세울 행위가 없는 죄인들을 위한 구호救護 처소이자 피난처라고, 바울은 생각하고 있다. 만일 율법으로 말미암은 혹은 행위로 말미암은 의義가 있다면, 그 의는 인간 자신 안에 존재할 것이다.

그러나 믿음으로 말미암아 인간은 자기 안에 없는 것을 다른 곳으로부터 끌어온다. 그러므로 믿음으로 얻는 의를 ‘전가된 것’이라고 이름 붙인 것은 정당하다.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믿으매 그것이 그에게 의로 여겨진 바 되었느니라

이 구절은 창세기 15장 6절에서 인용한 것이다. 그 말씀에서 ‘믿는다’는 단어를 어떤 특정 어구를 믿는 것으로만 제한해서 이해해서는 안 된다. 그 단어는 아브라함이 믿음으로 이해한 구원의 언약 전체와 양자됨의 은혜를 가리킨다.

물론 창세기 본문에 장차 얻게 될 씨에 대한 약속이 언급된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그 약속은 값없이 양자 되게 해주시는 은혜에 근거한 것이다.

여기서 주목해야 할 것은, 하나님의 은혜 없는 구원의 약속도 없고 구원 없는 하나님의 은혜에 대한 약속도 없다는 점이다.

다시 말하거니와, 우리가 하나님의 은혜로 혹은 구원의 소망으로 부르심을 받을 때는 반드시 그 부르심과 함께 우리에게 제시되는 의를 가지게 된다.

만일 우리가 이 입장을 취한다면, 다음과 같은 사실이 명백해진다. 즉, 바울이 모세가 기록한 이 구절을 그 문맥에 상관없이 왜곡해서 사용했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은 신학의 이 원리를 이해하지 못하는 것이다.

창세기 본문에 특별한 약속이 진술되어 있기 때문에, 그들은 아브라함이 그 약속을 믿는 면에서 존경할 만한 바른 행동을 취했다고 이해한다. 그리고 그 점에서 하나님의 인정을 받았다고 본다. 그러나 그들의 해석은 다음과 같은 이유에서 잘못된 것이다.

무엇보다, 그들은 ‘믿으매’라는 말이 문맥 전체에까지 미치는 것이라서 그것을 하나의 문장에만 해당되는 것으로 제한해서 보면 안 된다는 점을 인식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가장 중요한 실수는 그들이 하나님의 은혜에 대한 증거에서 출발하지 않았다는 점이다.

하나님께서는 사람들을 그분의 자녀로 양자 삼는 것과 아버지로서 베푸는 은총에 대해서 아브라함이 좀더 확신을 가지도록 하기 위해 이 은혜를 주신 것이다.

그리고 그 은혜에는 그리스도로 말미암은 영원한 구원이 포함되어 있다. 이런 이유 때문에 아브라함은 자기에게 제시된 그 은혜를 믿음으로 그저 받아들였을 뿐이다.

이는 그 은혜가 무효가 되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이다. 만일 이것이 그에게 의로 여겨졌다면, 그 의의 유일한 근거는 그가 하나님의 선하심을 신뢰했다는 것, 그리고 그가 모든 것을 그분으로부터 받을 것을 담대하게 소망했다는 것이라는 결론이 나온다.

모세는 사람들이 아브라함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했는지를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법정 앞에서 그가 어떤 자로 여겨졌는지를 언급한다.

그러므로 아브라함은 자기에게 약속으로 제시된 하나님의 선하심을 붙잡았고, 그렇게 함으로써 자신에게 의가 전가되고 있다는 것을 알았다. 의에 대한 개념을 가지기 위해서는 약속과 믿음의 이 관계를 이해할 필요가 있다.

왜냐하면 하나님과 우리 사이의 관계는 법률상 주는 자와 받는 자 사이에 존재하는 관계와 동일하기 때문이다. 우리에게는 복음의 약속으로 말미암아 의가 주어지기 때문에, 우리는 오직 그 이유 때문에 의를 얻는다. 그리고 우리가 의를 소유한다는 사실을 믿음으로 깨닫는다.

나는 이 구절에 반대되는 것처럼 보이는 야고보의 주장과 이 구절을 어떻게 조화시켜야 하는지 이미 설명했다. 그리고 만일 하나님께서 허락해주셔서 내가 야고보서를 다룰 수 있게 된다면, 그때 이 문제에 대해서 좀더 충분하게 설명하려 한다.

지금은 그저 의가 전가된 사람들은 의롭다 함을 얻는다는 사실만 주목하자. 왜냐하면 바울은 이 두 표현을 동의어로 사용하기 때문이다.

여기서 우리는, 쟁점이 되는 것은 인간이 본래 어떤 존재인가 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그들을 어떻게 보시는가 하는 것이라는 결론을 내리게 된다.

이는 양심의 순결함과 삶의 온전함이 하나님의 값없는 은총과 구별되기 때문이 아니다. 다만 하나님께서 왜 우리를 사랑하는지 그리고 왜 우리를 의롭다 인정하시는지 그 이유를 물을 때,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그분 자신의 의로 옷 입히시는 분으로 드러나야 하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