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런즉 육신으로 우리 조상인 아브라함이 무엇을 얻었다 하리요 롬4:1
바울은 실례를 제시함으로써 자신의 논증을 확실하게 한다. 그리고 그의 증거는 그 내용과 인물 면에서 그가 주장하는 바에 너무도 잘 들어맞기 때문에 충분히 결정적이다.
아브라함은 믿는 자들의 조상이었다. 또 우리 모두는 아브라함과 같은 자들이 되어야 한다. 그러나 모든 사람이 의를 얻을 수 있는 길은 여러 가지가 있는 것이 아니라 오직 하나밖에 없다.
여러 가지 다른 문제들에서는, 하나의 실례만으로 일반적인 규범을 만들기에는 역부족力不足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아브라함이라는 인물에게서는 모든 교회에 공통적으로 해당되는 의의 모범 혹은 모형이 제시되었다. 그러므로 바울이 아브라함 한 사람에 대해서만 기록된 내용을 교회의 몸 전체에 적용한 것은 옳은 일이다.
동시에 그는 자기들이 아브라함의 자손이라는 사실을 가장 그럴듯한 자랑으로 삼았던 유대인들을 이 실례를 통해 견제하기도 한다. 왜냐하면 그들은 거룩한 족장인 아브라함보다 자기들이 더 고결하다고는 감히 주장할 수 없었을 것이기 때문이다.
아브라함이 값없이 의롭다 함을 얻었다는 사실이 명백하므로, 율법으로 말미암은 자기들 나름의 의를 주장하는 그의 후손들은 수치심에 압도되어 입을 다물었어야 마땅하다.
바울의 글에는 ‘육신으로’라는 말과 ‘조상’이라는 말 사이에 ‘휴레케나이’hurekenai라는 동사가 삽입되어 있다. 그러므로 이 구절의 뜻은 다음과 같다.
“우리 조상인 아브라함이 육신으로 무엇을 얻었다 하리요?” 이런 이유 때문에 일부 해석자들은, 바울이 여기서 ‘아브라함은 육신으로 무엇을 얻었는가’를 묻고 있다고 주장한다.
만일 이 주해가 인정을 받는다면, ‘육신으로’라는 말은 ‘선천적으로’ 또는 ‘그 자신으로부터’라는 의미가 될 것이다. 그러나 ‘육신으로’라는 단어는 형용사구로서 ‘조상’이라는 말에 연결되어 있는 것이 거의 확실하다.
우리는 보통 우리에게 익숙한 예를 통해서 더 많은 영향을 받는다. 그래서 여기서 유대인들이 굉장한 자부심을 가지고 있는 그들 민족의 존엄성이 이 단어를 통해 다시 한번 생생하게 언급된 것이다. 어떤 사람들은 이 단어가 경멸의 뜻으로 덧붙여진 것이라고 생각한다.
어딘가 다른 구절에 보면, 아브라함의 자손을 이런 경멸적인 의미로 ‘육적’이라고 부른다. 그들이 영적이지도 않고 적법한 하나님의 자녀도 아니라는 것이 그 이유이다.
그러나 내 생각에 ‘육신으로’라는 표현이 여기서 사용된 것은 그것이 특별히 유대인들에게 해당되기 때문인 것 같다.
왜냐하면 육신의 혈통을 따라 나면서부터 아브라함의 자녀가 된다는 것은 단순히 그의 자녀로 입양되는 것보다 훨씬 더 영예로운 일이었기 때문이다.
물론 믿음도 있다는 전제가 따른다. 그러므로 그는 유대인들이 아브라함과 더 가까운 결속 관계에 있다는 것을 마지못해 인정한다.
그러나 그가 이렇게 한 유일한 이유는 그들로 하여금 자기들 조상의 본本에서 멀어지지 말라고 그들에게 더 깊이 각인시켜주기 위함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