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런즉 자랑할 데가 어디냐 있을 수가 없느니라 무슨 법으로냐 행위로냐 아니라 오직 믿음의 법으로니라 롬3:27
그는 충분히 결정적인 이유를 들어 사람들에게서 행위에 대한 확신을 없애버린 다음, 이제 그들의 허영을 질책한다. 그는 여기서 이런 식으로 절규할 필요가 있었다.
우리의 교만을 굴복시키기 위해서 성령께서 맹렬한 기세로 그 교만을 비난하지 않으신다면, 이 주제에 대해서 그가 교훈하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았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는 자랑할 여지가 전혀 없다는 것은 너무도 확실하다고 말한다.
왜냐하면 우리 자신에게서는 하나님의 인정이나 칭찬을 받을 만한 것이 아무것도 나올 수 없기 때문이다. 만일 공로가 자랑할 거리라면, 그것을 ‘적절한 공로’(congruous merit)라고 부르든 ‘당연한 공로’(condign merit)라고 부르든 (사람들은 공로를 쌓음으로 하나님의 환심을 사려 할 수도 있겠지만) 여기서 둘 다 아무 쓸모가 없게 된다.
바울은 지금 공로를 줄이거나 적당하게 하는 것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다. 그는 공로를 조금이라도 남겨놓는 것을 허용하지 않고 있다.
게다가 믿음이 행위에 대한 자랑을 제거해버린다면, 그래서 모든 것을 하나님의 자비하심으로 돌림으로써 인간에게서 모든 칭찬을 박탈하지 않고서는 믿음을 제대로 전할 수 없다면, 의를 얻는 데 어떤 행위도 도움이 안 된다는 결론이 나온다.
앞에서 바울 사도는 우리가 율법으로 말미암아 정죄를 받는다는 사실을 입증했다. 그런데 여기서는 우리의 공로가 허용되지 않는 것이 율법에 의해서가 아니라고 말한다. 그는 무슨 뜻으로 그렇게 말한 것인가?
만일 율법이 우리 모두를 죽음에 넘겨준다면, 우리가 율법에서 무슨 자랑을 얻겠는가? 오히려 율법은 우리에게서 모든 자랑을 앗아가고 우리를 수치로 뒤덮어버리지 않는가?
그래서 그는 우리 모두가 율법을 지키지 못하게 되었기 때문에 우리의 죄가 율법의 심판에 의해 드러나게 되었다고 밝힌 것이다. 한편 그가 여기서 의미하는 바는, 의가 행위의 율법으로 이루어진 것이라면 우리는 자랑할 것이 있었을 것이라는 말이다.
그러나 의는 오직 믿음으로 말미암기 때문에, 우리가 우리 소유라고 주장할 수 있는 것이 하나도 없다. 왜냐하면 믿음은 하나님께로부터 모든 것을 받으며, 믿음을 가지면 우리는 부족함에 대한 겸허한 고백밖에 할 수 없기 때문이다.
우리는 믿음과 행위 사이의 이 대조를 주의 깊게 살펴보아야 한다. 왜냐하면 여기서 행위는 어떤 특정한 수식어가 붙지 않은 채 보편적인 것으로 언급되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그는 율법의 의식을 준수하는 것에 대해서만 이야기하는 것도 아니고, 어떤 외적 행위를 특별하게 언급하는 것도 아니다. 그는 생각할 수 있는 모든 행위로 인한 공로를 전부 포함하고 있다.
여기서 ‘법’law이라는 단어를 믿음이라는 말에 적용한 것은 엄격히 말해서 옳지 않다. 그러나 그 단어 때문에 바울 사도가 전하려는 뜻이 조금이라도 흐려지는 것은 아니다.
그가 의미하는 것은, 우리가 믿음의 지배를 받게 될 때 행위에 대한 모든 자랑은 쓸모가 없게 되리라는 것이다. 그는 마치 이렇게 말하는 것 같다. “율법에서는 행위에서 나오는 의를 칭찬한다.
그러나 믿음으로 얻는 의는 그 나름의 법을 가지고 있는데, 그 법은 어떤 종류의 행위에도 의를 전혀 허용하지 않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