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빈주석 로마서
3장

로마서 3장 21절 칼빈 주석

이제는 율법 외에 하나님의 한 의가 나타났으니 율법과 선지자들에게 증거를 받은 것이라 롬3:21

이제는 율법 외에 하나님의 한 의가 나타났으니

우리가 믿음으로 말미암아 얻는 의를 그가 왜 ‘하나님의 의’라고 부르는지는 확실하지 않다. 하나님 앞에 설 수 있는 의는 믿음으로 말미암는 의밖에 없기 때문일 수도 있고, 아니면 하나님께서 그분의 자비하심으로 그 의를 우리에게 주시기 때문일 수도 있다.

두 해석 모두 적절하기에, 우리는 어느 한쪽을 지지하기 위해 논쟁하지는 않을 것이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전해주시는 의, 그리고 그분이 유일한 의로 인정하고 받아주시는 이 의가 ‘율법 외에’, 다시 말해서 율법의 도움 없이 나타났다고 그는 말한다.

여기서 율법은 행위를 의미하는 것으로 이해해야 한다. 그것을 율법의 교훈을 가리키는 것으로 보는 것은 적절하지 않다. 그가 바로 이어서 ‘믿음으로 말미암아 값없이 얻는 의에 대한 증거’로 율법의 교훈을 인용하고 있기 때문이다.

의식들을 가리키는 것으로 ‘율법’을 제한해서 이해하는 것은 무의미하고 융통성 없는 처사라는 것을 나는 곧 밝힐 것이다. 그러므로 여기서 우리는 ‘하나님의 의’에는 행위로 인한 공로가 배제되어 있음을 알게 된다.

또한 바울이 행위와 하나님의 자비를 뒤섞는 것이 아니라, 행위에 대한 모든 확신을 제거해서 완전히 없애버리고 오직 그분의 자비만 내세운다는 것도 알게 된다.

나는 어거스틴이 이 구절에 대해 다른 해석을 한 것을 잘 알고 있다. 그는 ‘하나님의 의’가 중생의 은혜라고 생각한다. 그는 말하기를, 우리가 아무 자격이 없는데도 하나님께서 그분의 영으로 우리를 새롭게 하시기 때문에 이 중생의 은혜는 값없는 것이라고 한다.

그는 율법의 행위, 즉 사람들이 자기를 새롭게 하지 않은 상태에서 하나님께 인정 받으려고 스스로 열심을 내서 하는 그런 행위를 ‘하나님의 의’에서 배제한다.

나는 일부 현대 이론가들이 마치 이 교리가 바로 지금 그들에게 계시되기라도 한 것처럼 그것을 자랑스럽게 제시하는 것도 너무나 잘 알고 있다. 그러나 문맥을 살펴보면 사도 바울이 모든 행위를 하나의 예외도 없이 다 포함하고 있다는 것이 분명하다.

심지어 주님께서 그분 자신의 백성들에게 제시한 그런 행위들까지 포괄한다. 바울이 4장 첫 부분에서 아브라함이 행위로 말미암아 의롭다 하심을 얻은 것이 아니라고 말할 때, 그것은 아브라함이 하나님의 영에 의해서 중생했고 인도함을 받았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그는 흔히 말하는 도덕적으로 선한 행위들과 선천적인 본능으로 행하는 행위들뿐만 아니라 심지어 신자들이 할 수 있는 그런 행위들까지 인간의 칭의稱義에서 배제시키고 있다.

다시 말하거니와, 만일 “허물의 사함을 받고 자신의 죄가 가려진 자는 복이 있도다”(시 32:1)라고 말하는 것이 믿음으로 얻는 의의 정의定義라면, ‘어떤 종류의 행위인가’에 대해서는 논쟁의 여지가 없다. 다만 행위로 인한 공로가 폐해지고, 죄 사함을 받는 것만이 의의 원인으로 확증된다.

인간이 믿음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의 은혜로 의롭다 칭함을 받는다는 명제, 그리고 인간은 영적 중생에서 유래하는 행위로 말미암아 의롭다 칭함을 받는다는 명제, 이 둘은 서로 완벽하게 조화를 이룬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값없이 새롭게 하시고 우리 또한 그분의 은사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받기 때문이다. 그러나 바울은 아주 특이한 원리 한 가지를 제시한다. 즉, 인간의 양심은 하나님의 자비만을 의지하기 전까지는 결코 평화를 누릴 수 없으리라는 것이다.

다른 성경 구절에서 그는 하나님께서 그리스도 안에 계셔서 인간을 의롭다 칭하신다고 우리에게 가르친 다음, 그분이 ‘그들의 죄를 그들에게 돌리지 않으심으로써’ 그렇게 하신다면서 그분의 칭의의 방식을 설명한다(고후 5:19).

이와 마찬가지로 갈라디아서에서도 그는 칭의의 효과와 관련해서 율법을 믿음과 대립되는 위치에 놓는다. 왜냐하면 율법은 율법이 명하는 것을 행하는 자들에게 생명을 약속하기 때문이다(갈 3:12).

또한 율법은 행위의 외적인 업적뿐만 아니라 하나님에 대한 신실한 사랑도 요구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믿음으로 얻는 의에는 행위로 인한 그 어떤 공로도 끼어들 여지가 없다는 결론이 내려진다.

그러므로 다음과 같이 말하는 것은 어이없는 반론임이 명백해진다.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의롭다 칭함을 받는 것은 우리가 그리스도의 지체이기에 성령에 의해 새롭게 되기 때문이다. 또 우리가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롭다 칭함을 받는 것은 우리가 믿음으로 그리스도의 몸에 연합되기 때문이다. 그리고 우리가 값없이 의롭다 함을 얻는 것은 하나님께서 우리 안에서 죄밖에 찾으실 수 없기 때문이다.”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 있는 것은 우리 자신에게서 벗어나 있기 때문이다. 또 우리가 ‘믿음 안에’ 있는 것은 우리가 하나님의 자비하심만 의지하고 그분의 값없는 약속들을 의존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우리가 ‘값없이’ 의롭다 함을 얻는 것은 하나님께서 우리의 죄를 장사지냄으로써 우리를 그분과 화목하게 하시기 때문이다. 이것은 저 해석자들이 분별없이 주장하는 것처럼 칭의의 시작에만 제한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왜냐하면 “허물의 사함을 받고 자신의 죄가 가려진 자는 복이 있도다”라는 정의定義는 다윗이 하나님을 섬기는 면에서 오랫동안 훈련을 받은 후에 그 결과로서 내린 것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아브라함은 성결함에서 비할 데 없이 훌륭한 모범이 되기는 하지만, 하나님께 부름을 받고 30년이 지났을 때에도 그분 앞에 자랑할 만한 아무런 행위가 없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약속을 믿는 그의 믿음이 그에게 의로 여겨진 것이다. 하나님께서 인간의 죄를 그들에게 돌리지 않음으로써 그들을 의롭다 칭하신다고 바울이 우리에게 가르칠 때, 그는 교회에서 사람들이 날마다 반복하는 구절을 인용하는 것이다.

더군다나 행위 때문에 깨어지는 그 양심의 평화는 단 하루만 유지되는 현상이 아니라 우리의 평생에 걸쳐 지속되어야 한다. 여기서 우리가 오직 그리스도만을 바라보지 않는다면 죽을 때까지 의롭다 함을 얻은 상태에 머물 수 없을 것이라는 결론이 내려진다.

하나님께서는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양자 삼으셨고, 지금도 우리를 그분 안에서 받아들여진 자로 여기신다. ‘성경에 따르면 우리는 믿음으로 말미암아서만 의롭다 함을 얻는다’라는 우리의 주장에 대해서 옳지 못하게 우리를 비난하는 자들의 궤변도 동일한 논증으로 반박할 수 있다.

그들이 내세우는 이유는 배타적 불변화사 ‘오직 … 만’alone이 성경 어디에도 없다는 것이다. 그러나 칭의가 율법에 근거하는 것도 아니고 우리 자신에게 달려 있는 것도 아니라면, 하나님의 자비하심에만 돌려져야 마땅한 것이 아닌가? 그리고 칭의가 그분의 자비하심으로만 되는 것이라면, 그것은 오직 믿음으로만 얻게 되는 것이다.

‘이제는’이라는 불변화사는 시간과는 관계 없이 단순히 반대의 뜻을 나타내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 우리가 종종 ‘그러나’라는 말 대신 ‘이제는’이라는 말을 쓰는 것과 같다.

만일 이 단어를 시간과 관계된 뜻으로 이해하기를 원한다면(그리고 나는 교묘히 둘러댄다는 의심을 받고 싶지 않기에 이 견해를 기꺼이 인정한다), 이 어구를 의식들만 폐해졌다는 뜻으로 이해해서는 안 된다.

왜냐하면 바울이 여기서 의도한 바는 우리를 구약의 선조들보다 더 우월한 위치에 있게 해준 은혜를 율법과 비교해서 설명하려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이제는’이라는 단어를 시간과 관계된 뜻으로 이해한다고 할 때 이 어구의 의미는, 그리스도께서 육신을 입고 나타나신 이후에 복음이 전파됨으로써 믿음으로 얻는 의가 계시되었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를 근거로 그리스도께서 오시기 전에는 믿음으로 얻는 의가 감추어져 있었다는 결론을 내릴 수는 없다. 왜냐하면 믿음으로 얻는 의가 두 가지로 나타났다는 점을 여기서 주목해야 하기 때문이다.

첫째로 구약에서는 말씀과 성례聖禮로 말미암아 나타났고, 둘째로 신약에서는 의식들과 약속들뿐만 아니라 그것들이 그리스도 안에서 성취됨을 통하여 나타났다. 또한 복음으로 말미암아 이 의가 더욱 분명하게 나타나게 되었다고 덧붙여 말할 수 있다.

율법과 선지자들에게 증거를 받은 것이라

바울이 이 어구를 덧붙이는 이유는, 복음이 우리에게 값없는 의를 주는 면에서 율법과 상반되는 것으로 보이지 않도록 하기 위함이다. 그러므로 그는 믿음으로 얻는 의가 율법의 도움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고 말했으면서도, 지금은 그 의가 율법의 증거로 확증된다고 주장한다.

만일 율법이 값없는 의를 증거한다면, 율법이 사람들에게 행위로 말미암아 스스로 의를 얻는 방법을 가르쳐주기 위하여 주어진 것이 아님이 명백해진다. 그러므로 율법을 이런 목적에 소용되게 하는 사람들은 그것을 왜곡하는 것이다.

‘율법과 선지자가 값없는 의를 증거한다’는 사실을 입증하기 원한다면, 모세의 교훈의 주요 골자를 차례대로 살펴보는 것이 좋을 것이다. 그러면 다음과 같은 사실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

처음에 하나님 나라에서 쫓겨난 인간에게 주어진 회복의 수단은 다름 아닌 ‘복된 씨’에 관련된 복음의 약속에 담겨져 있었다. 그 약속에 따르면, 그 복된 씨로 말미암아 뱀의 머리가 상하게 될 것이고 그 복된 씨를 통하여 열방이 축복을 받게 될 것이라고 했다.

우리는 계명들 속에서 우리의 부정不淨함에 대한 증거를 보게 될 것이다. 그리고 희생제물과 봉헌된 공물供物들을 통해서 우리는 속죄와 정결하게 됨은 오직 그리스도 안에서만 찾을 수 있다는 진리를 배우게 될 것이다.

예언서에 오게 되면, 우리는 값없이 주어지는 자비에 대한 가장 분명한 약속들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 이것에 대해서는 나의 《기독교 강요》Institutes를 참고하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