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러므로 율법의 행위로 그의 앞에 의롭다 하심을 얻을 육체가 없나니 율법으로는 죄를 깨달음이니라 롬3:20
박학博學한 학자들 사이에서도 ‘율법의 행위’(works of the law)가 의미하는 바가 무엇인지에 대해서 약간 미해결된 부분이 있다.
어떤 사람들은 율법의 행위가 율법 전체의 준수를 포괄하는 것으로 확대 해석하는가 하면, 다른 사람들은 그 표현이 의식儀式들만 가리킨다고 본다.
크리소스톰(Chrysostom, 349~407. 초기 기독교의 교부이자 콘스탄티노폴리스의 대주교로서 뛰어난 설교자이기도 함)과 오리겐과 제롬(Jerome, 347~420. 초대교회의 신학자이자 서방 교회의 4대 교부 중 한 사람으로서 성경을 라틴어로 번역함)은 여기에 ‘율법’이라는 말이 첨가되어 있는 것을 보고 후자의 의견을 수용한다.
이 어구가 모든 행위를 의미하는 것으로 이해되는 오류를 막기 위해서, 율법이라는 말이 특별한 의미를 담고 추가된 것으로 본 것이다.
그러나 이 어려운 문제는 아주 쉽게 해결될 수 있다. 우리가 행위를 통해서 하나님을 예배하고 그분께 순종하고자 애쓴다면, 그 행위는 그분 앞에서 정당하다.
그러므로 바울은 모든 행위에서 칭의稱義의 능력을 좀더 확실하게 제거하기 위해서, 우리를 의롭게 만들어줄 수 있는 가능성이 제일 많은 (만일 행위에 그런 능력이 있을 수 있다면) 그런 행위들을 ‘율법의 행위’라는 용어로 표현한 것이다.
이는 율법에 약속이 담겨 있고, 그 약속이 없이는 하나님 앞에서 우리의 행위가 아무런 가치가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여기서 우리는 바울이 ‘율법의 행위’라고 분명하게 언급한 이유를 알게 된다.
즉, 우리의 행위가 평가를 받는 것은 율법에 의해서이기 때문이다. 중세의 신학 교수들도 이 사실을 꽤 잘 알고 있었다. 그들은 ‘행위는 아무런 본질적인 가치를 가지고 있지 않지만 하나님의 언약으로 말미암아 가치 있게 된다’는 진부한 격언을 믿고 있었기 때문이다.
물론 그들이 잘못 생각하는 면이 있다. 그들은, 우리의 행위가 죄악으로 말미암아 항상 타락한 상태에 있고, 그 죄악은 우리의 행위가 그 어떤 공로도 인정 받지 못하게 만든다는 사실을 알지 못한다.
그러나 행위에 대한 보상이 율법의 값없는 약속에 달려 있다는 것은 여전히 사실이다. 그러므로 바울이 단순한 행위에 대해서 논하지 않고 율법을 지키는 것에 대해서 구별해서 확실하게 언급한 것은 정당하고 현명한 처사이다. 율법 준수는 본래 그가 다루고 있는 주제였다.
다른 박식한 학자들이 이 견해를 지지하면서 제시한 논증은 기대만큼 그렇게 강하지 못했다. 그들은 할례에 대한 언급이 오직 의식儀式들과만 관련된 하나의 예로 제시되었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우리는 왜 바울이 할례를 언급했는지 이미 설명했다. 이는 오직 위선자들만이 자기들의 행위에 대한 확신으로 우쭐해 있었기 때문이다.
또한 우리는 그들이 겉으로 드러나는 모습만 자랑한다는 것을 안다. 그들이 볼 때 할례는 율법에서 나오는 의를 얻기 위한 일종의 기초 과정 같은 것이었다.
그러므로 할례는 그들에게 가장 영예로운 행위처럼 보였을 뿐만 아니라 사실 행위에서 난 의의 토대로 여겨졌던 것이다. 이들 학자들은 또한 바울이 갈라디아서에서 말한 것을 근거로 할례를 반대한다.
갈라디아서에서 그는 동일한 주제를 다루면서 오직 의식들에 대해서만 언급한다. 그러나 그 논증 역시 그들이 원하는 바를 이룰 수 있을 만큼 충분히 강하지 않다.
바울은 사람들에게 의식들에 대한 잘못된 확신을 불어넣었던 자들과 논쟁하고 있었다. 이 잘못된 확신을 제거하기 위해서, 그는 단순히 의식들만 언급하는 수준에서 그치지 않으며 또 그 의식들의 가치에 대해서 구체적으로 논하지도 않는다.
이 주제와 관련된 모든 성경 본문들에서 보는 것처럼, 그는 율법 전체를 포괄해서 이야기하는 것이다. 제자들이 예루살렘에서 펼쳤던 논증의 성격도 이와 마찬가지였다.
우리가 바울이 여기서 율법 전체에 대해서 이야기하고 있다고 주장하는 데는 그럴 만한 충분한 이유가 있다. 그가 지금까지 따라왔고 앞으로도 계속 따라갈 일련의 논리가 우리의 주장을 확실하게 뒷받침해주고 있다.
또한 다른 많은 성경 본문들도 우리가 다른 식으로 생각하는 것을 허용하지 않는다. 그러므로 어느 누구도 율법을 지킴으로 의를 얻을 수 없다는 것은, 우리가 기억해야 할 가장 중요한 진리이다.
바울은 이 진리에 대한 그 나름의 이유를 제시했고 곧 그 이유를 다시 언급할 것이다. 즉, 모든 사람이 예외 없이 죄를 범하여 율법에 의해 의롭지 못하다는 정죄를 받는다는 것이다.
앞으로 더 자세히 살펴보겠지만, 행위로 말미암아 의롭다 함을 얻는다는 명제와 죄를 범하여 유죄하다는 명제, 이 둘은 서로 반대된다. ‘육체’라는 말은 좀더 일반적인 의미를 전달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특별히 구체적인 설명이 없을 때는 사람을 의미한다.
갈리우스(Gallius, 기원전 126~62. 로마제국의 위대한 배우이자 키케로의 친구)에게서 볼 수 있는 것처럼, ‘모든 사람’(All men)이라고 말하는 것보다 ‘모든 죽을 인생’(All mortals)이라고 말하는 것이 훨씬 의미심장한 것과 마찬가지이다.
바울은 역으로 논증을 펴나간다. 생명과 죽음이 한 원천에서 나오지는 않는다. 즉, 율법은 우리에게 죄를 깨닫게 해주고 우리를 정죄하기 때문에, 거기에서 우리가 의롭다 함을 얻지는 않는다는 것이다.
율법의 반대 작용을 언급함으로써 율법이 우리에게 의를 줄 수는 없음을 입증한 그의 논법은 다음과 같은 주장이 첨가되어야만 그 효력을 발휘한다.
즉, 인간에게 그의 죄를 보여줌으로써 구원의 소망을 단절시켜 버리는 것은 율법에서 분리해낼 수 없는 불변하는 사실이라는 점이다.
율법은 의가 무엇인지 우리에게 가르쳐주기 때문에, 율법 그 자체는 사실 구원에 이르는 길이다. 그러나 우리의 부패와 타락 때문에, 우리는 이 면에서 율법으로부터 아무 유익을 얻지 못한다. 한 가지 더 덧붙여야 할 것은, 죄인임이 드러난 사람은 어느 누구든 의를 박탈당한다는 점이다.
궤변론자들이 하는 것처럼, 반쪽짜리 의(half-righteousness)라는 개념을 만들어내서 행위가 부분적으로 인간을 의롭게 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은 경솔한 짓이다. 인간의 타락 때문에 이런 일은 전혀 있을 수가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