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빈주석 로마서
3장

로마서 3장 4절 칼빈 주석

그럴 수 없느니라 사람은 다 거짓되되 오직 하나님은 참되시다 할지어다 기록된바 주께서 주의 말씀에 의롭다 함을 얻으시고 판단 받으실 때에 이기려 하심이라 함과 같으니라 롬3:4

사람은 다 거짓되되 오직 하나님은 참되시다 할지어다

다른 사람들이 이 구절을 어떻게 해석하든, 나는 이것을 이와 반대되는 주장에 대한 필연적인 귀결에서 나온 논증이라고 생각한다. 이 결론을 제시함으로써 바울은 앞에서 제기되었던 반론을 무력하게 만든다.

만일 하나님은 참되시고 사람은 거짓되다는 이 두 명제가 서로 일치하며 조화를 이룬다면, 하나님의 진리가 인간의 거짓됨 때문에 무가치하게 되지는 않는다는 결론이 나온다.

이 시점에서 바울이 이 두 원리를 대조하지 않았다면, 나중에 그가 ‘하나님께서 우리의 불의를 통해 그분의 의로우심을 드러내신다면 그분이 어떻게 의로우실 수 있는가’라는 반론의 불합리함을 논박하려고 한 시도는 아무 성과를 거두지 못했을 것이다.

그러므로 이 어구의 의미는 아주 분명하다. 하나님의 미쁘심은 인간의 불신과 배반으로 말미암아 없어지기는커녕 오히려 더 분명해진다는 것이다. 그가 ‘하나님은 참되시다’라고 말한 것은 단순히 그분이 자신의 약속을 신실하게 지킬 준비를 하고 계시기 때문이 아니라 자신이 말씀으로 선포한 것은 무엇이든지 실제로 이루시기 때문이다.

이는 그분이 “나의 능력이 어떠한 것처럼 나의 하는 일도 그러하니라”라고 말씀하시기 때문이다. 반면에 사람이 거짓된 것은 단순히 그가 종종 약속을 어기기 때문이 아니라 본래 거짓됨을 추구하고 진리를 멀리하기 때문이다.

하나님이 참되시다고 하는 첫 번째 명제는 모든 기독교 철학의 가장 중요한 원리이다. 인간이 거짓되다고 하는 두 번째 명제는 시편 116편 11절에서 가져온 것으로, 그 구절에서 다윗은 사람에게는 확실한 것이 전혀 없다고 고백한다(우리말 성경에는 모든 사람이 거짓말쟁이라고 되어 있다 - 역자 주).

이것은 주목할 만한 구절이며, 우리에게 절실하게 필요한 위로의 내용을 담고 있다. 하나님의 말씀을 받아들이지 않고 경멸하는 면에서 인간은 너무도 사악하기 때문에, 하나님의 진리가 인간의 진실됨의 여부에 달려 있지 않다는 사실을 기억하지 않는다면 우리는 그분의 진리의 확실성을 종종 의심했을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바울이 앞에서 이야기한 내용, 즉 하나님의 약속이 효력을 발휘하려면 그것을 받는 인간 쪽에서의 믿음이 요구된다는 내용과 어떻게 부합되는가? 믿음은 거짓됨과 반대되지 않는가? 이 질문은 분명 난해하게 보이지만, 그 답은 그렇게 어렵지 않다.

인간의 거짓이 주님의 진리에 방해물이 되기는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분은 길 없는 곳에서 여전히 자신의 진리를 위한 길을 찾으실 것이다.

그리하여 그분은 자신이 택하신 자들 안에 있는 선천적인 본성의 불신앙을 고쳐주심으로써, 그리고 정복하기 힘들 것 같은 사람들을 복종시켜 그분께 순종하게 하심으로써 승리자로 떠오르실 것이다.

여기서 덧붙여야 할 내용은, 바울이 지금 인간 본성의 타락을 치료해주는 하나님의 은혜가 아니라 그 타락에 대해서 논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주께서 주의 말씀에 의롭다 함을 얻으시고

이는 우리의 거짓됨과 믿음 없음이 하나님의 진리를 파괴하기는커녕 그것을 더 분명하고 돋보이게 해준다는 의미이다. 다윗은 다음과 같이 말함으로써 이 사실을 증언한다.

즉, 자기는 죄인이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자기에게 무슨 일을 하기로 결정하시든 간에 그분은 항상 공평하고 의로우신 심판자가 되실 것이며, 그분의 의로움에 대해서 불평할 경건하지 않은 자들의 모든 비방을 무력하게 만들 것이라고 말한다.

다윗이 말하는 하나님의 ‘말씀’은 그분이 우리에게 선언하시는 심판을 의미한다. 이 단어를 흔히 생각하는 것처럼 하나님의 ‘약속’이라고 이해하는 것은 너무도 부자연스럽다.

그러므로 접사接辭 ‘that’은 ‘~하기 위하여’라는 목적절을 이끄는 것이 아니며 무리한 결론을 가리키는 것도 아니다. 다만 ‘내가 당신께만 범죄하였으므로 당신이 나를 벌하시는 것은 정당하나이다’라는 결론을 암시할 뿐이다(우리말 성경에는 ‘that’이 특별히 번역되지 않았으나 칼빈 역에는 이 어구가 ‘that’이라는 접사로 시작된다. ‘That thou mightest be justified in thy words’ - 역자 주).

곧바로 덧붙여진 “우리의 부정不淨함이 하나님의 영광을 더 높인다면 어떻게 하나님의 의가 완전한 채로 남아 있겠는가?”라는 반론은, 바울이 이 구절을 다윗이 의도한 의미대로 적절하게 인용했다는 것을 입증한다.

앞서 제시한 것처럼, 만일 다윗이 하나님께서 그분의 놀라운 섭리로 인간의 죄까지도 그분의 의를 드높이도록 만드셨다는 의미로 말한 것이 아니라면, 바울이 이 어려운 문제로 독자들의 주의를 끈 것은 아무런 효과도 없을 뿐만 아니라 적절하지도 않은 일이 된다.

판단 받으실 때에 이기려 하심이라

이 문장은 히브리어로 “그리고 당신은 당신의 판단에서 순전하다 하려 하심이라”라고 되어 있다. 이 표현은 경건하지 않은 자들이 아무리 떠들어대고 증오에 찬 불평을 늘어놓음으로써 하나님의 영광을 무색하게 하려 해도, 그분은 그 모든 심판을 행하시는 면에서 찬양을 받으시기에 합당하다는 단순한 의미이다.

바울은 히브리어 본문을 쓰지 않고 헬라어 역본을 따랐는데, 이는 그가 여기서 의도한 바에도 잘 들어맞는다. 우리가 알기로, 사도들은 성경을 인용할 때 종종 원문보다는 의역意譯에 가까운 언어를 사용한다.

그들은 자기들이 인용한 내용이 다루고 있는 주제에 맞으면 만족했기 때문이다. 따라서 그들은 단어를 사용하는 면에서 지나치게 신경을 쓰지는 않았다.

그러므로 이 어구는 다음과 같이 의역할 수 있을 것이다. “인간의 죄 중에서 어떤 것이라도 주님의 영광을 나타내는 데 필요하다면, 그리고 그분이 자신의 진리로 말미암아 특별히 영광을 받으신다면, 인간의 거짓됨까지도 그분의 진리를 무너뜨리기보다는 확증하는 역할을 한다는 당연한 결론이 나온다.”

‘크리네스다이’(krinesthai, 판단하다)라는 말이 수동적인 의미로뿐만 아니라 능동적인 의미로도 이해될 수 있지만, 헬라어 번역자들은 다윗 선지자가 의도한 것과는 반대로 그 단어를 수동적인 의미로 이해한 것이 분명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