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직 이면적 유대인이 유대인이며 할례는 마음에 할지니 영에 있고 율법 조문에 있지 아니한 것이라 그 칭찬이 사람에게서가 아니요 다만 하나님에게서니라 롬2:29
바울이 덧붙인 이 구문은 다음과 같이 이해해야 한다. ‘율법 조문’이라는 말은 경건함이 없는 외적인 의식을 뜻하고, ‘영’이라는 말은 이 의식의 영적인 취지finem를 의미한다.
표적과 의식(儀式)의 진정한 중요성은 그것이 가진 목적(a fine pendeat)에 달려 있다. 그러므로 이 목적이 제거된다면, 그 자체로는 아무 쓸모가 없는 율법 조문만 남게 된다.
바울이 이 말을 하는 이유는 다음과 같다. 하나님의 음성이 들릴 때 인간이 그것을 신실한 마음으로 받지 않을 경우, 그분이 명하시는 모든 것은 율법 조문, 즉 사문(死文)으로(in frigida scriptura) 남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만일 하나님의 음성이 인간의 마음 깊이 스며들게 되면, 그 음성은 어느 정도 ‘영’으로 변화된다. 여기에는 예레미야가 예레미야서 31장 33절에서 주목한 것처럼, 옛 언약과 새 언약 사이의 차이가 암시되어 있다.
그 구절에서 주님께서는 자신의 법을 그들 속에 두고 그들의 마음에 기록한 후에, 자신의 언약을 승인하여 확정할 것이라고 선언하신다. 바울은 다른 구절에서도 이와 동일한 점을 염두에 두고 말한다(고후 3:6).
그 구절에서 그는 율법을 복음과 비교하면서, 율법은 죽어 있을 뿐만 아니라 죽이기까지 하는 ‘율법 조문’이라고 부르는 반면 복음은 ‘영’이라는 이름을 붙여서 돋보이게 한다. ‘율법 조문’이 진정한 의미를 가진 것이고 ‘영’은 비유적인 의미를 가진 것이라고 간주하는 사람들은 이 구절을 완전히 잘못 해석하는 것이다.
인간의 눈은 단지 겉으로 드러나는 모습만 보기 때문에, 사람들이 자기들 생각에 근거해서 칭찬하는 것에 우리가 만족해서는 안 된다고 바울은 말한다.
사람들은 화려한 겉모습에 기만당할 경우가 종종 있다. 그러므로 오히려 우리는 마음속 가장 깊은 곳의 은밀함까지도 보시는 하나님의 눈으로 만족해야 한다.
이런 식으로 그는 거짓된 평판으로 스스로를 기만하는 위선자들을 하나님의 법정으로 소환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