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가 율법을 행하면 할례가 유익하나 만일 율법을 범하면 네 할례는 무할례가 되느니라 롬2:25
바울은 유대인들이 자신들의 주장을 변호하면서 그의 주장에 반대하여 이의를 제시할 수도 있음을 미리 예상하고 이를 다룬다. 만일 할례가 주님의 언약에 대한 상징이라면, 그리고 주님께서 할례로 말미암아 아브라함과 그의 후손을 자신의 특별한 백성으로 택하셨다면, 그들이 이런 면에서 헛된 자랑을 한 것 같지는 않다.
그러나 그들은 할례라는 표적이 의미하는 바를 소홀히 여기고 오직 겉으로 드러나는 할례의 모습만 주시했다. 그래서 그는 단순한 표적 때문에 어떤 것에 대한 권리를 주장할 만한 근거는 전혀 없다고 답한다.
할례의 진정한 특성은 영적인 약속이며, 그 약속은 믿음을 요구했다. 그런데 유대인들은 그 약속과 믿음 둘 다 소홀히 여겼다. 이런 이유 때문에 그들의 확신은 무익한 것이었다. 갈라디아서에서처럼 바울이 여기서 할례의 주요 용도에 대해 언급하지 않고 그들의 명백한 오류를 보여주는 쪽으로 이야기를 진행시키는 것도 바로 이런 이유 때문이다.
우리는 이 점을 주의 깊게 눈여겨보아야 한다. 왜냐하면 바울이 할례의 전체적인 특징과 목적을 설명하고 있었다면, 은혜와 값없이 주시는 약속에 대해서 언급하지 않는 것은 앞뒤가 맞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는 갈라디아서에서나 로마서에서나 자기가 다루는 주제가 요구하는 바에 따라 이야기하고 있다. 즉, 그는 논쟁이 되고 있는 부분만 논한다.
유대인들은 할례 자체가 의(義)를 얻기에 충분하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바울은 그들 자신의 용어로 논증을 펴면서 다음과 같이 응답한다. 즉, 할례를 통해서 의를 얻기를 기대한다면 거기에는 한 가지 조건이 있는데, 할례 받는 사람이 자기가 하나님을 전적으로 온전하게 예배하는 자라는 사실을 입증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할례는 온전함을 요구한다.
우리의 세례에 대해서도 이와 마찬가지로 말할 수 있다. 어떤 사람이 마치 세례의식 자체로부터 거룩함을 얻기라도 하는 것처럼 오직 세례에 사용되는 물만 신뢰하면서 자기가 의롭게 된다고 생각한다면, 우리는 그러한 생각에 이의(異意)를 제기하면서 세례의 목적을 증거로 제시해야 한다.
즉, 세례는 주님께서 그 의식을 통해 우리를 거룩한 삶으로 부르시기 위한 것이다. 이런 경우에 세례가 우리에게 증거하고 인쳐 주는 은혜와 약속에 대해서는 언급하지 않을 것이다. 왜냐하면 우리가 상대해야 하는 사람들은 세례라는 공허한 그림자에 만족하면서 그 안에 담긴 진정으로 중요한 의미를 존중하지도 않고 고려하지도 않는 자들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바울에게서 다음과 같은 점을 주목할 수 있을 것이다. 그가 신학적 논쟁과는 별개로 표적에 대해서 신자들에게 이야기할 때는 그 표적이 가지고 있는 효력과 약속을 그들에게 연결시킨다. 그러나 표적의 특성에 대해서 알지 못하는 터무니없는 해석자들과 논쟁할 때는 그 표적이 가지고 있는 진정하고 고유한 특성에 대한 모든 언급을 일체 생략하며, 그들의 거짓된 해석을 반박하는 쪽으로 모든 논증의 방향을 잡는다.
바울이 율법의 다른 어떤 행위가 아닌 할례를 증거로 제시하는 것을 보고서, 그가 의식(儀式)에서만 칭의(稱義)의 개념을 박탈하고 있다고 추측하는 학자들이 많이 있다.
그러나 사실은 전혀 그렇지 않다. 감히 하나님의 의에 대항해서 자신의 공로를 내세우는 사람들은 항상 진정한 선(善)보다는 외적인 율법의 준수를 자랑한다. 그러나 하나님에 대한 경외로 말미암아 그 마음에 감동을 받은 사람은 어느 누구도 감히 눈을 들어 하늘을 우러러보지 않을 것이다. 왜냐하면 진정한 의를 얻고자 노력하면 할수록, 그는 자기가 그 의에 얼마나 많이 못미치는지 더욱 분명하게 깨닫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겉으로 거룩한 척하는 것으로 만족하는 바리새인들이 너무도 쉽게 스스로를 기만하는 것에 대해 우리는 놀랄 필요가 없다. 할례로 말미암아 자기들이 의롭게 되었다고 자랑하는 그들의 어설픈 핑계 말고는 유대인들에게 아무것도 남겨두지 않았던 바울은, 이제 그들에게서 그 무의미한 허세까지도 벗겨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