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빈주석 로마서
2장

로마서 2장 17절 칼빈 주석

유대인이라 불리는 네가 율법을 의지하며 하나님을 자랑하며 롬2:17

유대인이라 불리는 네가

일부 고대 사본에서는 이 어구의 시작 부분을 ‘에이 데’(ei de, though indeed)라고 읽는다[우리말 성경에서는 아무런 접속사 없이 이 구절이 시작되는 것처럼 번역되어 있으나, 칼빈 역에는 ‘그러나 만일’(But if)이라는 단어로 문장이 시작된다 - 역자 주].

만일 이렇게 읽는 것을 일반적으로 받아들인다면, 나는 그것을 인정하는 것이 좋다고 본다. 그러나 대부분의 사본들이 이렇게 읽는 것을 반대한다. 또 그렇게 읽지 않는 것이 의미상으로도 적절하다. 그래서 나는 예전 방식대로 읽는 것을 고수하는 바이다. 무엇보다도 개입된 한 단어로 인한 아주 미세한 차이밖에 없다.

지금까지 이방인들에 대해서 다룬 바울은 이제 유대인들에 대한 이야기로 돌아온다. 그들이 가진 모든 헛된 자부심을 더욱 효과적으로 꺾어 놓기 위하여, 우선 그는 그들의 마음을 우쭐하게 하고 부풀게 했던 그 모든 특권들을 인정한다. 그런 다음 그는 이런 특권들이 진정한 영광을 얻기에는 얼마나 턱없이 부족한지, 그리고 사실 이것들 때문에 그들이 얼마나 부끄러움을 당하게 되는지 보여준다.

바울은 율법과 선지자에게서 유래되었노라고 그들 민족이 헛되이 자랑하는 모든 특권들을 ‘유대인’이라는 이름에 포함시키고 있다. 그리고 그는 ‘유대인’이라는 이 용어를 사용함으로써 모든 이스라엘 사람들을 포괄했다. 그 당시에 모든 이스라엘 사람들은 아무 구별 없이 유대인이라고 불렸던 것이다.

유대인이라는 이름이 언제 처음으로 생겼는지는 불분명하지만, 유대인의 이산(離散). 바벨론 포로 이후 유대인들이 이방인들 사이에 흩어져 살게 된 것) 이후에 처음으로 사용되었다는 점에는 의심의 여지가 없다.

요세푸스(Josephus, 37~100. 유대인 정치 선동가이자 역사가)는 자신의 저서 《유대 고대사》Antiquities 11권에서 유대인이라는 이름이 유다 마카비우스(Judas Maccabaeus, 기원전 2세기에 활동한 유대인 혁명가)에게서 유래되었다고 밝힌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마카비우스의 지도 아래 있을 때, 한동안 실추되어 거의 사장(死藏)되다시피 했던 그들의 자유와 영예가 다시금 회복되었다. 나는 요세푸스의 말이 맞을 수도 있다고 본다. 그러나 혹시 이러한 생각에 만족하지 못하는 사람들이 있을 수도 있다는 가정 아래, 나만의 다른 추측을 제시해 보고자 한다.

나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숱한 패배로 인해 비천한 처지가 되어 다른 나라로 널리 흩어지게 된 후에, 아마도 자기들 민족만의 분명한 독특성을 보유할 수 없었을 것이라고 확신한다.

그 당시에는 국가적 차원의 인구 조사를 할 수도 없었으며, 이런 체제를 유지하는 데 필요한 정부가 있었던 것도 아니다. 또 그들이 거주하는 지역도 여기저기 뿔뿔이 흩어져 있었고, 고난으로 인해 지쳐버린 그들은 자기들 계보系譜에 별 주의를 기울이지 못했음이 분명하다.

나의 이러한 가설(假說)을 인정하지 못한다 하더라도, 그토록 혼란스러운 상황에서 그들 민족의 독특성이 사라질 위험이 있었을 것이라는 점은 부인할 수가 없다. 그러므로 미래를 준비하기 위한 의도였든 아니면 자기들이 이미 경험하고 있는 재난을 해결해보려는 의도였든, 내 생각에 그들 모두 ‘유대인’이라는 그 민족의 이름을 동시에 취했던 것 같다.

유대인, 그것은 그들 종교의 순수성을 아주 오랫동안 보존해온 이름이었으며, 구속주(救贖主)가 나올 것으로 기대되는 민족이라는 그 고유한 특권으로 말미암아 다른 모든 민족 위에 뛰어났던 이름이었다.

극단적인 곤경에서 그들이 찾은 마지막 피난처는 메시아에 대한 기대로 스스로를 위로하는 것이었다. 어떠하든 그들은 유대인이라는 이름을 통해, 자기들이 주님께서 아브라함 및 그의 후손과 맺은 언약의 상속자임을 고백했다.

율법을 의지하며 하나님을 자랑하며

바울은 그들이 율법을 준수하는 것에 심혈을 기울이기라도 한 것처럼 율법 연구에 의지했다는 의미로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다. 그와는 반대로, 율법을 주신 목적을 깨닫지 못한 것에 대해서 그들을 책망하는 것이다.

그들은 율법을 지키는 것에 소홀했고, 하나님의 계시가 자기들 것이라는 확신 하나만으로 교만에 가득 차 있었다. 그들이 하나님을 자랑하는 것도 이런 식이었다.

즉, 주님께서 그분의 선지자를 통해 우리에게 명하신 것처럼(렘 9:24) 우리 스스로를 낮추고 오직 그분 안에서만 우리의 자랑을 구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선하심에 대해서는 아무것도 알지 못한 채 그분을 자기들의 독자적(獨自的)인 하나님으로 삼았던 것이다.

그들은 마음속으로는 하나님을 모시고 있지 않았으면서, 다른 사람들 앞에서 쓸데없이 과시하기 위해서 자기들을 그분의 백성으로 생각했다. 그러므로 이것은 마음에서 우러나온 자랑이 아니라 말로만 떠들어대는 허풍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