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빈주석 로마서
2장

로마서 2장 15절 칼빈 주석

이런 이들은 그 양심이 증거가 되어 그 생각들이 서로 혹은 고발하며 혹은 변명하여 그 마음에 새긴 율법의 행위를 나타내느니라 롬2:15

그 마음에 새긴 율법의 행위를 나타내느니라

다시 말하면, 그들은 자기들 마음에 분별하고 판단할 수 있는 능력이 새겨져 있음을 입증한다는 것이다. 그 분별력과 판단력으로 말미암아 그들은 정의와 불의(不義), 정직함과 부정직함을 구별한다.

그러나 바울은 그 힘이 그들의 의지에 새겨져 있어서 그들이 부지런히 그것을 찾고 구한다는 뜻으로 말하는 것이 아니다. 그들이 진리의 힘에 의해 철저하게 지배를 받고 있기 때문에, 그 힘을 도무지 부인(否認)할 수 없다는 이야기를 하는 것이다.

만일 그들에게 하나님을 예배해야 한다는 확신이 없었다면, 그들은 종교적인 의식을 제정하지 않았을 것이다. 또한 간음과 도적질을 악으로 간주하지 않았다면, 그들은 그러한 행위를 부끄러워하지 않았을 것이다.

율법을 지키는 것은 우리의 능력 안에 있는 일이라고 바울이 말하기라도 한 것처럼, 이 구절에서 ‘의지의 힘’(the power of the will)을 추론해낼 만한 근거는 전혀 없다. 왜냐하면 그는 율법의 요구를 만족시킬 수 있는 우리의 능력에 대해서 말하는 것이 아니라 율법에 대한 우리의 지식에 대해서 언급하고 있기 때문이다.

‘마음’이라는 단어는 감정이 자리하는 곳이라는 의미가 아니라, 다음의 구절들에서처럼 그저 ‘이해력’이라는 의미로 받아들여야 한다. “그러나 깨닫는 마음과 … 여호와께서 너희에게 주지 아니하셨느니라”(신 29:4). “미련하고 … 마음에 더디 믿는 자들이여”(눅 24:25).

이 구절에서 인간 안에 율법에 대한 ‘온전한’ 지식이 있다는 결론을 내릴 수는 없다. 다만 인간의 본성에 정의의 씨앗이 얼마간 심겨져 있다고 이야기할 수 있을 뿐이다.

이는 모든 이방인들이 하나같이 종교 의식들을 제정하고, 간음과 도적질과 살인을 응징하는 법을 만들며, 상업적인 거래와 계약에서 탄탄한 신용을 높이 평가한다는 사실에서 입증된다. 이런 식으로 그들은, 인간이 하나님을 경배해야 하고 간음과 도적질과 살인은 악이며 정직을 존중해야 한다는 사실을 자기들이 알고 있음을 증거하는 것이다.

그들이 하나님을 어떤 부류의 신(神)으로 받아들이는지 혹은 그들이 얼마나 많은 신들을 고안해왔는지 알아보는 것은, 우리가 논하고자 하는 바가 아니다. 하나님 같은 분이 계시며 그분은 영광과 경배를 받아 마땅하다고 그들이 생각한다는 것, 그것을 아는 것으로 충분하다.

그들이 다른 사람의 아내나 소유물이나 그에게 속한 어떤 것을 탐하는 행위를 허용하든지 아닌지 또는 그들이 분노와 증오를 묵인하든지 아닌지, 그것은 중요한 문제가 아니다. 왜냐하면 자기들이 잘못된 행실이라고 알고 있는 바를 그들이 간절히 바란다는 것은 옳지 않기 때문이다.

이런 이들은 그 양심이 증거가 되어

천 명의 증인에 상당하는 그들 자신의 양심의 증거, 그것은 바울이 이방인들에게 가장 강한 압력을 가할 수 있는 수단이었다. 인간은 자기가 선행을 했다는 것을 앎으로써 힘과 위로를 얻지만, 악을 행했다는 것을 의식하게 되면 내적으로 시달리며 고통스러워한다. 그래서 이방 격언에 다음과 같은 말이 있는 것이다.

“선한 양심은 가장 넓은 활동 무대이지만, 악한 양심은 가장 악랄한 사형 집행인으로서 어떤 원귀(怨鬼)보다도 더 잔인하게 경건한 자들을 괴롭게 한다.” 그러므로 인간에게는 ‘어떤 행위는 선하고 따를 만한 가치가 있는 반면 다른 행위는 몸서리를 치면서 피해야 한다’고 말해주는 율법에 대한 어떤 선천적인 지식이 있다.

바울이 양심에 대해서 얼마나 학자다운 정의(定義)를 내렸는지 주목하라. 그는, 우리의 바른 행위를 변호하기 위해 우리가 취하는 생각들이 있는가 하면 우리의 악행에 대해 우리를 고발하고 정죄하는 생각들도 있다고 말한다.

바울은 생각들이 서로 고발하기도 하고 변명하기도 하는 이 과정을 주님의 날에 연결시킨다. 이는 그 과정이 그 날이 되어야만 시작될 것이기 때문이 아니라 그 날에도 효력을 발휘할 것이기 때문이다.

사실 현세에서도 그 생각들은 계속적으로 그 기능을 행하고 있다. 여기서 바울이 이런 논증을 펴는 이유는, 어느 누구도 그 생각들을 중요하지 않은 것으로 여기거나 금방 사라질 것으로 업신여기지 않도록 하기 위함이다. 앞에서 그런 것처럼 그는 여기서도 ‘그 날까지’보다는 ‘그 날에’라는 표현을 사용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