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빈주석 로마서
2장

로마서 2장 8절 칼빈 주석

오직 당을 지어 진리를 따르지 아니하고 불의를 따르는 자에게는 진노와 분노로 하시리라 롬2:8

당을 지어 … 불의를 따르는 자에게는

이 구절은 약간 애매하다. 우선 본문의 전체적인 의미가 끊어진다. 논증의 맥이 이어지려면 비교 대상이 되는 두 번째 항목은 첫 번째 항목의 문장 구조와 일치해서 다음과 같은 식으로 되어야 한다.

“주님께서는 참고 선을 행하여 영광과 존귀와 썩지 아니함을 구하는 자에게는 영생을 주실 것이지만, 다투기를 좋아하고 불순종하는 자들에게는 영원한 사망을 주실 것이다.” 그런 다음에 이런 결론이 내려져야 한다. “전자(前者)를 위해서는 영광과 존귀와 썩지 아니함이 보장된 반면, 후자(後者)를 위해서는 진노와 고통이 준비되어 있다.”

이 구절이 애매한 또 다른 이유는 ‘진노, 분노, 환난, 곤고’라는 단어들이 문맥상 서로 다른 두 개의 절에 사용되고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해서 이 구절의 의미가 혼란스러워지는 것은 결코 아니다.

그리고 사도들의 글을 읽을 때 이런 점이 발견되더라도 그러려니 하고 받아들여야 한다. 멋진 수사법은 다른 저자들에게서 배울 일이다. 세련되거나 고상한 맛이 부족하고 충분히 문학적인 표현 양식을 갖추지 못한 이 글에서 우리가 구해야 할 것은 바로 영적인 지혜이다.

여기에 언급된 ‘당 짓는 것’은 반항적이고 고집스러운 것을 의미한다. 왜냐하면 지금 바울은 아무 개념 없이 가증스러운 자기 탐닉에 빠짐으로써 하나님을 비웃고 경멸하는 위선자들과 논쟁하고 있기 때문이다.

‘진리’라는 말은 계시된 하나님의 뜻을 의미할 뿐이다. 그분의 뜻만이 진리의 빛이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멍에를 짊어지기보다는 항상 죄악에 굴복하는 쪽을 택하는 것은 모든 불신자들의 공통적인 특징이다.

그리고 아무리 겉으로 순종하는 척하더라도, 그들은 하나님의 말씀에 반대하여 야유를 보내며 완강하게 대적하기를 멈추지 않는다. 누가 봐도 악인(惡人)임이 분명한 사람들은 하나님 말씀의 진리를 조롱한다. 이와 마찬가지로 위선자들은 그 진리를 대적하여 거짓된 예배 형태를 만들어 내는 데 조금의 주저함도 보이지 않는다. 사도 바울은 여기서 더 나아가서, 그런 불순종하는 자들이 ‘불의(不義)를 따른다’고 덧붙인다.

주님의 법에 굴복하기를 거부하는 자들에게, 그들을 죄의 노예 상태로 굴러떨어지지 않도록 해줄 중간 지대 같은 것은 없다. 하나님께 순종하기를 좋아하지 않는 사람들이 죄의 노예가 되는 것은 난폭하고 부도덕한 자들이 받아야 할 마땅한 보상이다.

진노와 분노로 하시리라

이 단어의 본질절인 의미를 살리려면 이렇게 번역할 수밖에 없다. 키케로(Cicero, 기원전 106~43. 로마 시대의 정치가, 웅변가, 문학가, 철학자)가 그의 저서 《투스쿨란의 대화》Tusc. 4권에서 우리에게 가르쳐주는 것처럼, 헬라어로 ‘쑤모스’thumos라는 말은 라틴어에서 ‘excandescentia’(분노, 영어의 indignation)라고 부르는 것으로, 갑작스러운 분노의 폭발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이 구절의 나머지 단어들에 대해서는 에라스무스의 번역을 따랐다. 그러나 여기 언급된 네 단어 중에서 마지막 두 단어(환난과 곤고)는 앞의 두 단어(진노와 분노)의 결과임을 주목하라. 하나님의 노여움과 언짢음을 경험하는 자들은 즉시 부끄러움을 당하기 때문이다.

바울은 참 신자들이 받게 되는 복과 버림 받은 자들이 당하는 파멸에 대해서 한두 마디로 간략하게 기술할 수도 있었다.

그러나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진노에 대한 두려움을 좀더 효과적으로 느끼게 하기 위해서, 그리고 그리스도를 통한 은혜를 얻고자 하는 그들의 열망을 북돋우기 위해서, 그는 이 두 가지 주제를 자세하게 진술한다.

우리는 하나님의 심판에 대해서 마땅히 두려워해야 함에도 불구하고, 누군가 그 심판에 대해서 우리 눈앞에 생생하게 그려주지 않으면 결코 그것을 두려워하지 않는다. 또한 여러 가지 자극을 받음으로써 정신을 차리지 않으면, 내세에 대한 갈망으로 가슴이 사무치는 일도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