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빈주석 로마서
2장

로마서 2장 4절 칼빈 주석

혹 네가 하나님의 인자하심이 너를 인도하여 회개하게 하심을 알지 못하여 그의 인자하심과 용납하심과 길이 참으심이 풍성함을 멸시하느냐 롬2:4

그의 인자하심과 … 풍성함을 멸시하느냐

내가 볼 때 이 구절에는 일부 학자들이 주장하는 것처럼 딜레마가 존재하는 것 같지는 않다. 오히려 바울은 이의(異意)가 제기될 만한 내용을 예상하고 있는 것 같다.

위선자들은 자기들의 선한 행위로 하나님의 자비하심을 얻기라도 한 것처럼 스스로의 형통함에 대해 우쭐해하는 것이 보통이다. 그래서 하나님을 경멸하는 그들의 마음은 더 완고해진다.

이런 이유 때문에 사도 바울은 그들의 교만함을 미리 조처하는 것이다. 그는 반대 논증을 폄으로써, 그들이 외적으로 형통하다고 해서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호의를 베푸신다고 생각할 만한 이유는 전혀 없음을 입증한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는 인간에게 유익이 될 만한 전혀 다른 계획을 가지고 계시기 때문이다.

즉, 그분은 죄인들을 자신에게 돌아오도록 하기 위해서 그렇게 하시는 것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마음이 충분하지 않은 상황에서 형통함을 신뢰하는 것은, 그분의 측량할 수 없는 인자하심을 경멸하고 조롱하는 것이다.

여기서 우리는 다음과 같은 결론을 내릴 수 있다. 즉, 현세(現世)에서 하나님께서 목숨을 보전해주신 자들에게는 더 과중한 형벌이 부과될 것이다. 왜냐하면 그들은 다른 사악함에 더하여, 아버지로서 베푸시는 하나님의 초청을 거절했기 때문이다.

하나님께서 베푸시는 모든 호의가 아버지로서의 그분의 인자하심을 드러내는 여러 증거가 되는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그분은 마음에 다른 목적을 가지고 계실 때가 종종 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친절을 베푸시면서 자기들을 관대하게 지원해주신다고 해서, 자기들이 그분께 사랑스러운 존재라도 되는 것처럼 경건하지 않은 자들이 스스로의 형통함을 자축(自祝)하는 것은 잘못된 것이다.

하나님의 인자하심이 너를 인도하여 회개하게 하심을 알지 못하여

주님께서는 그분의 선하심을 통하여, 스스로의 안녕(安寧)을 간절히 원한다면 우리가 바라보아야 할 분은 바로 하나님이라는 사실을 보여주시는 동시에 우리가 그분의 자비하심을 더 담대하게 바랄 수 있도록 우리에게 확신을 더해주시기도 한다.

만일 우리가 하나님께서 주시는 풍성함을 이런 목적을 위해서 사용하지 않는다면, 우리는 그것을 남용하는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의 풍성함을 늘 동일한 견지에서 봐서는 안 된다.

주님께서 자신의 종들을 호의적으로 대하시고 그들에게 세상적인 복을 주실 때, 그분은 이런 종류의 표지를 통해 그들에게 자신의 선한 뜻을 알리시는 것이며, 동시에 그들로 하여금 오직 그분 안에서만 모든 선한 것들을 구하도록 훈련시키신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그분의 법을 어기는 자들을 동일한 은혜로 대하실 때, 그분은 자신의 인자하심을 통하여 그들의 완고함을 누그러뜨리려 하신다. 그렇다고 해서 그분이 그들을 기뻐하신다고 선언하시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그분은 그들에게 회개를 요구하신다.

하나님께서 그들의 마음을 내적(內的)으로 만지지 않으신다면 귀머거리들에게 간청하는 것과 마찬가지라면서 반론을 제기하는 사람이 있을 수도 있다. 이런 반론에 대해 우리는, 이 경우에 비난을 받아야 하는 것은 우리 자신의 사악한 본성이라고 대답해야 한다.

나는 ‘요구하여’calleth라는 말보다는 ‘인도하여’leadeth라는 번역이 더 마음에 든다. 왜냐하면 후자가 더 함축적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나는 ‘인도하여’라는 말을 무리하게 몰아댄다는 의미보다 오히려 손을 잡아 이끈다는 의미로 받아들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