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빈주석 로마서
1장

로마서 1장 24절 칼빈 주석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그들을 마음의 정욕대로 더러움에 내버려두사 그들의 몸을 서로 욕되게 하게 하셨으니 롬1:24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그들을 … 내버려두사

경건하지 않음은 은밀한 악이다. 그래서 바울은 그들이 마땅한 정죄를 당하지 않고 도망할 수 없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서 좀더 분명한 증거를 제시한다. 왜냐하면 주님의 진노에 대한 명백한 증거를 보여주는 열매들이 경건하지 않음의 결과로 생겨났기 때문이다.

그러나 만일 주님의 진노가 늘 공의롭다면, 그들로 하여금 정죄를 면할 수 없게 만드는 무언가가 있었다는 말이 된다. 그래서 지금 바울은 이런 증거들을 사용해서 인간의 배교(背敎)와 변절을 입증하는 것이다.

이는 주님께서 그분의 선하심에서 멀어져간 사람들을 여러 모양의 파멸과 멸망으로 급하게 몰아넣음으로써 벌하시기 때문이다. 그들이 범한 죄악들을 그가 앞에서 고발한 그들의 경건하지 않음과 대조시킴으로써, 그는 그들이 하나님의 공의로운 심판에 따른 형벌을 당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다른 무엇보다도 우리의 명예가 소중하다는 것을 감안할 때, 주저하지 않고 스스로를 욕되게 한다는 것은 우리가 철저하게 눈멀었다는 이야기이다. 그러므로 그것은 하나님의 위엄을 욕되게 한 것에 대한 가장 합당한 보응인 셈이다.

이것이 바로 바울이 이 장(章)의 끝부분까지 계속해서 밀고나가는 주제이다. 그러나 이 주제는 충분한 설명을 요하기 때문에, 그는 다양한 방법을 사용해서 이를 다룬다.

그러므로 요약하자면, 바울이 말하고 있는 바는 인간이 하나님께 감사하지 않는 것은 변명할 도리가 없다는 것이다. 그들의 실상을 볼 때,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사정없이 진노를 발하고 계신다는 것이 확실하게 입증되기 때문이다.

그들이 하나님의 증오와 적대감을 자초(自招)하지 않았다면, 그들은 결코 짐승들처럼 정욕에 이끌린 그런 가증스러운 행위에 빠져들지 않았을 것이다. 더할 나위 없이 눈꼴사나운 악들이 도처에서 자행되고 있었기 때문에, 그는 하나님의 보복하심에 대한 의심할 수 없는 증거들이 인류에게서 명백하게 나타나고 있다고 결론짓는다.

하나님의 이 보복하심은 아무런 이유 없이 혹은 부당하게 쏟아부어지는 일이 결코 없으며 항상 합당한 범위 내에서 행해진다. 그러므로 이를 근거로 바울은 정당하고도 확실한 파멸이 인류 전체를 위협하는 것이 분명하다고 우리에게 말한다.

이 시점에서 하나님께서 어떻게 인간을 사악함에 넘기시는지 장황하게 논할 필요는 전혀 없다. 참으로 분명한 것은 하나님께서 인간이 타락하도록 내버려두심으로써, 그리고 그것을 묵인하심으로써 그들이 죄에 빠지는 것을 허용하신다는 사실이다.

그분이 자신의 의로운 심판에 따라서 그 일을 작정하셨기 때문에, 인간은 자기 자신의 악한 열망에 의해서뿐만 아니라 마귀에 의해서도 그런 무모한 어리석음에 빠질 수밖에 없게 된다는 것 또한 분명하다. 그러므로 바울은 성경에서 일관되게 사용하는 어법(語法)에 따라 ‘내버려두다’라는 단어를 채택하고 있다.

우리가 하나님의 허용하심에 의해서만 죄에 이끌리게 된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은, 이 단어의 의미를 심하게 곡해한다. 왜냐하면 사탄은 하나님의 진노를 대행하는 자, 곧 그분의 ‘집행자’이기 때문에, 그는 단지 겉으로만이 아니라 재판관이신 하나님의 명령에 따라 우리를 대적하여 싸우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하나님이 잔인하신 것도 아니고 우리가 무죄한 것도 아니다. 왜냐하면 바울은 우리가 그런 형벌을 받아 마땅할 때만 그분의 능력에 넘겨진다는 점을 분명하게 보여주기 때문이다. 우리가 유일하게 예외를 두어야 할 점은 죄의 원인이 하나님에게서 나오지 않는다는 것이다.

죄의 뿌리는 언제나 죄인 자신 안에 존재한다. 왜냐하면 “이스라엘아 네가 패망하였나니 이는 너를 도와주는 나를 대적함이니라”(호 13:9)는 말씀이 언제나 사실이기 때문이다.

그는 인간 마음에 있는 악한 욕망을 ‘더러움’에 연결시킴으로써, 일단 우리 마음을 그냥 내버려둘 때 어떤 열매들이 맺히는지 간접적으로 우리에게 비추어준다. ‘서로’라는 표현은 그 어조가 강하다. 왜냐하면 인간이 자기들 몸에 새겨놓은 파렴치한 행위의 표시들이 얼마나 깊고 지울 수 없는 것들인지, 그 단어가 함축적으로 표현해주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