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빈주석 로마서
1장

로마서 1장 23절 칼빈 주석

썩어지지 아니하는 하나님의 영광을 썩어질 사람과 새와 짐승과 기어다니는 동물 모양의 우상으로 바꾸었느니라 롬1:23

썩어지지 아니하는 하나님의 영광을 … 바꾸었느니라

인간은 자기들의 육적인 감각으로 이해할 수 있는 그런 하나님을 생각했기 때문에, 그들이 참 하나님을 인정한다는 것은 불가능했다. 그래서 그들은 하나님 대신 새로운 거짓 신, 아니 좀더 정확히 말하면 환영(幻影)을 만들어냈다.

바울이 말하는 바는 그들이 ‘하나님의 영광을 바꾸었다’는 것이다. 사람이 아이를 다른 아이와 바꿔치기하는 방식처럼 그들은 참 하나님에게서 떠난 것이다. 그렇지만 그들은 하나님께서 하늘에 계시다는 것을 믿었고 그 나무 우상을 하나님이 아니라 그분의 형상으로(pro simulacro) 생각한 것이라고 변명한다 할지라도, 그들이 용서받을 수 있는 것은 아니다.

감히 그분의 형상을 만들 정도로 그분의 위엄에 대한 저속한 생각을 해낸다는 것은 하나님에 대한 모욕이기 때문이다. 제사장이든 정치가든 철학자든 그 누구도 그런 뻔뻔하고 참람한 죄를 짓지 않은 사람이 없었다. 그들 중 가장 사려 깊은 분별력을 가진 플라톤(Plato, 기원전 427~347. 그리스의 철학자로서 소크라테스의 제자)조차 하나님 안에서 어떤 형상(formam in Deo)을 찾아내고자 애썼다.

그러므로 여기서 우리는 인간의 지극히 어리석은 모습을 주목하게 된다. 즉, 모든 인간이 스스로 하나님의 형상을 만들고 싶어 했다는 것이다.

이것은 하나님에 대한 그들의 생각이 저속하고 불합리하다는 것을 확실하게 입증해준다. 먼저 그들은 하나님을 ‘썩어질 사람’의 우상으로 만들어 그분의 위엄을 더럽혔다. (나는 에라스무스가 채택한 ‘죽을 수밖에 없는 인생’이라는 번역보다 ‘썩어질 사람’이라는 이 번역이 더 마음에 든다.)

왜냐하면 바울은 하나님의 불멸성을 인간의 죽을 수밖에 없는 운명과 대조할 뿐 아니라 그분의 썩지 않는 영광을 참으로 비천한 인간의 상태와 대조하고 있기 때문이다. 나아가서, 그런 엄청난 죄를 저지르고도 만족스럽지 않은지, 그들은 한 술 더 떠서 짐승과 가장 저급한 종류의 우상을 만드는 수준으로까지 전락했다.

이로 인하여 그들의 어리석음은 한층 더 분명하게 드러났다. 독자들은 이런 가증스러운 관행에 대한 설명을 락탄티우스(Lactantius, 240~320. 초기 기독교의 신학자이자 저술가)와 유세비우스(Eusebius, 260~340. 가이사랴 교구의 감독이며 기독교 교회사의 최초의 저자)의 글에서, 그리고 어거스틴의 《신의 도성》(City of God)에서 볼 수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