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빈주석 로마서
1장

로마서 1장 17절 칼빈 주석

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서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게 하나니 기록된바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함과 같으니라 롬1:17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서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게 하나니

이것은 복음이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이라고 진술한 앞 절에 대한 설명이자 확증이다. 우리가 구원, 즉 하나님과 함께하는 삶을 추구한다면, 우리는 먼저 의를 구해야 한다. 그 의로 말미암아 우리는 그분과 화목하게 될 수 있으며, 우리에게 자비를 베푸시는 그분을 통하여 그분의 은총만이 존재하는 삶을 얻을 수 있다.

우리가 하나님께 사랑을 받으려면 먼저 의로워야 한다. 그분은 불의不義를 몹시 싫어하시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이 어구는 우리가 복음으로부터만 구원을 얻을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하나님께서는 복음 외의 다른 어느 곳에서도 우리에게 그분의 의를 계시하지 않으시기 때문이다. 그분의 의만이 우리를 사망에서 구해내신다. 우리 구원의 기초가 되는 이 의는 복음 안에서 계시된다. 그러므로 복음은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이라고 일컬어지는 것이다. 이런 식으로 우리는 원인에서 결과까지 논증을 펼 수 있다.

나아가서 하나님께서 그분의 복음 안에서 우리에게 주신 보화, 즉 그분의 의를 전해주신 것이 얼마나 진기하고 귀한지 주목하라.

나는 ‘하나님의 의’라는 말이 그분의 법정에서 인정되는 것을 의미한다고 본다. 이는 사소한 것일지라도 사람이 보기에 의롭다고 간주되는 것을 일반적으로 ‘사람의 의’라고 부르는 것과 마찬가지이다. 그러나 성령께서 미래의 그리스도의 나라에 나타나게 될 하나님의 의에 대해서 도처에서 말씀하신 여러 예언들을, 바울이 여기서 넌지시 비추고 있음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

일부 주석가들은 ‘하나님의 의’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것’을 의미한다고 설명한다. ‘하나님의 의’라는 말이 그런 의미를 담고 있다는 것을, 나는 분명히 인정한다. 하나님께서 그분의 복음으로 말미암아 우리를 의롭다 칭하시고, 그렇게 해서 우리를 구원하신다. 그러나 나는 앞에서 설명한 의미가 더 적절하다고 본다. 그렇다고 이 문제에 대해서 많은 시간을 할애할 생각은 없다.

좀더 중요한 문제는, 일부 주석가들이 값없이 죄를 용서해 주는 것뿐 아니라 부분적으로는 거듭남의 은혜에도 이 ‘의’가 존재한다고 생각한다는 점이다. 그러나 나는 하나님께서 값없이 우리를 그분과 화목하게 하시기 때문에 우리가 생명을 다시 얻을 수 있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이 문제에 대해서는 나중에 적절한 곳에서 좀더 길게 다룰 것이다.

이제 그는 앞에서 사용했던 ‘모든 믿는 자에게’라는 표현 대신 ‘믿음으로’라는 말을 쓴다. 의는 복음으로 말미암아 제시되고 믿음으로 받아들여지기 때문이다.

그는 ‘믿음에’라는 말을 덧붙이는데, 이는 우리의 믿음이 진보하고 지식이 자라갈수록 ‘하나님의 의’가 우리 안에서 커지고 우리가 그 의를 소유했다는 사실이 어느 정도 확증되기 때문이다.

우리는 처음 복음의 맛을 볼 때, 우리를 은혜롭게 바라보시는 하나님의 얼굴을 보게 된다. 그러나 멀리서 볼 뿐이다. 참 종교에 대한 우리의 지식이 더 많아질수록, 우리는 그분의 은혜를 더 분명하고 스스럼없이 보게 된다. 마치 그분이 우리에게 더 가까이 다가오시기라도 하는 것과 같다.

이 어구에 옛 언약과 새 언약 사이의 대조가 내포되어 있다고 보는 생각은 그 근거가 충분하지 않고 애매하다. 바울은 여기서 율법 아래 살았던 조상들과 우리를 비교하는 것이 아니라 모든 신자들이 이루어가는 매일의 진보를 가리키고 있기 때문이다.

기록된바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그는 하박국 선지자의 권위를 빌어 믿음에서 난 의에 대해서 증거한다. 하박국은 교만한 자들의 파멸을 예언하면서 동시에 “의인은 그의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합 2:4)라고 덧붙인다. 의로 말미암지 않고는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 살 수가 없다.

그러므로 우리의 의는 믿음에 달려 있다는 결론이 나온다. 미래 시제로 된 ‘살리라’라는 동사는 그가 말하고 있는 삶이 끊어지지 않고 영원하리라는 것을 가리킨다. 그는 마치 이렇게 말하는 것 같다.

“그 삶은 잠시 동안 지속되는 것이 아니라 영원히 계속될 것이다.” 불경건한 자들 또한 삶에 대한 헛된 생각으로 우쭐해 있지만, “그들이 평안하다, 안전하다 할 그 때에 … 멸망이 갑자기 그들에게 이르리니 결코 피하지 못하리라”(살전 5:3). 그러므로 그들의 삶은 잠시 동안만 지속되는 그림자이다.

오직 의인의 믿음만이 영생을 가져다준다. 우리를 하나님께로 인도하고 우리의 삶을 그분께 의존하게 해주는 믿음 외에 무엇이 삶의 원천이겠는가?

하박국 선지자가 믿음으로 하나님께 의지할 때만 우리가 견고히 선다는 뜻으로 이야기한 것이 아니라면, 바울이 그에게서 이 구절을 인용한 것은 적절하지 않았을 것이다. 불경건한 자들이 세상에 대한 자랑을 포기하고 오직 하나님의 보호하심에만 자기들을 맡길 때, 오직 그때만 그들의 삶이 믿음으로 말미암는 것이 된다고 그는 주장한다. 하박국이 이 문제를 분명하게 다루지 않은 것은 사실이다.

그는 값없이 얻는 의에 대해서 아무런 언급을 하지 않는다. 그러나 믿음의 본질로 미루어볼 때, 하박국의 증언이 지금 우리가 다루고 있는 주제에 적절하게 적용된다는 것은 매우 분명하다. 또한 우리는 그의 논증으로부터 믿음과 복음간의 상호 관계를 필연적으로 추론하게 된다. ‘의인은 그의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라고 했으므로, 바울은 그러한 삶을 복음으로 말미암아 받게 된다고 주장한다.

이제 우리는 이 서신의 첫 부분의 가장 중심이 되는 요점을 보게 된다. 그것은 우리가 오직 하나님의 자비하심을 통해서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롭다 칭함을 받는다는 사실이다. 지금까지는 우리가 바울이 직접 한 말을 통해 이 요점을 알게 된 것은 아니다. 그러나 믿음에 근거한 의가 전적으로 하나님의 자비하심에 달려 있다는 것은 나중에 문맥을 통해 쉽게 접하게 될 것이다.